0인칭 시점 / 0-Person Perspective

2020.10.22
Gyeonggi Creation Center

- 김수나,김영구,민혜기,박관택, 박소영, 정현두, 조선경, 조현택





적절히 수반되어야 하는 의심들: 정현두의 최근 회화들에 부쳐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가에게는 작업의 시작과 끝에 있어 주관적 판단의 준거가 작용한다. 이 기준에 따라 회화를 위한 실행을 거듭할 때, 생성된 이미지들은 의도된 것이건 그렇지 않건 일종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 또한 이미지는 축적, 유통, 소비의 과정과 연동되며 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구획 짓는다. 다만 정현두에게 이 순환의 사이클은 종종 의문에 부쳐진다. 그는 경향성이 만들어내는 형식이 주관적 감각을 가시화하는 결과물임을 인지하면서도 이것이 감각적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에게 회화를 구성하는 지지체는 그를 평면에 몰두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면서 매 순간 극복해야 할 선입견이다. 그림에서 의식적/무의식적 판단들이 초래한 사건이 지나치게 반복되거나 더 이상 유의미한 서사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는 이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듯하다. 따라서 형식 안으로의 침잠 그리고 그 밖으로 이탈하는 의미 규정 이전의 몸짓, 이것들의 만남과 충돌이 반복되며 회화적 실험이 계속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그의 작품에는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하는 이미지를 도출하는 경우의 수를 늘리고자 하는 시도가 드러난다. 일상에서 체득한 감각과 기억의 얼개들이 평면 위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개연성을 얻을 수 있는지 가늠하는 불확실하고도 흐릿한 시간이 반복된다.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크고 작은 진동이 날것의 색과 붓터치로 옮겨져 비정형의 자국을 남긴다. 그러나 중첩되는 행위의 결과물이 형식적 실험의 지대 안에만 머무른다는 느낌보다, 그가 그림과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조율하며 두 항(작가-회화) 사이의 지속 가능성을 탐색하고 대화의 외연을 넓혀간다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질문은 더 나은 형식의 결과물을 위한 것이기 보다 유연한 회화적 언어를 획득하기 위한 태도와 위치 설정에 관한 것이다. 필자와 나눈 대화에서도 그의 관심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 관한 것에서 다소간 멀어져 있었음을 다시금 떠올린다.



정현두에게 회화는 완벽히 통제 가능한 객체나 나와 분리된 별개의 타자이기보다, 그와 같은 위치에서 사유의 틀과 움직임의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다. 또한 작업을 해나가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가 캔버스 앞을 떠나 있을 때도 작품이 그와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는 욕구가 곧 회화를 상생하는 유기체로 다루고자 하는 태도로 연결된다. 그가 견지하는 시점은 한시적 개체(object)가 아닌 현상학적 경험을 현재의 감각으로 이행(transitive)시키는 일종의 기류(current)와도 같은 회화를 생각하게 한다. 단일한 형상을 지탱하는 각각의 평면은 현실에서 살아있는 것으로서 그 방향성과 윤곽을 끝없이 조정하며 주체적으로 의미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 바로 이 관점이 회화를 견고한 물리적 한계들 안으로 함몰 시키지 않은 채 자율적인 신호체계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근작 앞에서 선행되어야 할 읽기는 그가 여러 평면과 맺었을 관계의 방식과 거리, 그 사이에서 발생한 유무형의 에너지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 그림과 그는 충분히 가까운가? 혹은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의 회화는 생산자로부터 부여받은 임의의 형태를 넘어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가? 재현된 이미지의 영역 밖에서 그림은 어떤 감각을 전달하고 있는가? 지금 작가와 대면하고 있을 또 다른 그림은 현실에서 어떤 경험을 창출하는 장이 될 것인가? 위와 같은 질문들이 수반될 때, 정현두의 회화는 건조한 명사의 나열이 아닌 동사의 능동태로 존재하며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어긋난 풍경>

안부(작가, [별관]기획자)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일상 속 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장면을 지나친다. 대게는 반복적인 장면을 지나칠 수 있고 그 장면을 시간이라는 단위에 기대어 분류하고 기억하기 마련이다. 이마저도 의식적으로 기억을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이며 시간의 단위는 찰나를 기억하기엔 너무나 순간이자 형식적인 분류일지 모른다. 오전이나 밤, 며칠이거나 몇 시가 아닌 그 때, 여기에서의 ‘때’ 가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부분이 아닌, ‘장면’ 혹은 ‘풍경’ 이라는 상황으로 분류하여 일상을 기억하는 방법을 취한다면 ‘그 때’는 어긋난 것일까?



‘풍경’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풍경은 일상의 단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쓰임이 없는, 특별히 그러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단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장관이라 불릴만한 자연을 마주할 때가 아니면 대체로는 미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상황에서나 쓰임이 있는, 그마저도 ‘풍경화’ 나 ‘산수화’ 같은 자연을 담은 명칭 따위에 부여 된다. 이미 어떤 모습 ~scape처럼 수많은 단어가 이어져 다양한 풍경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Landscape, Cityscape. Nightscape, Mindscape 등 나열하자고 마음만 먹으면 이 한 페이지는 다 채울 수도 있지 싶다. 이쯤에서 다시금 ‘풍경’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자연경관이나 경치의 영역이 아닌 어떤 상황이나 순간, 장면에 집중하는 형태의 단어로 지칭하는 의미가 되어본다.

여기 이상한 풍경의 그림이 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을 해줘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풍경. 어딘가 지워진 흔적, 무언가 남겨졌거나 남아있는 잔재의 파편들. 감추려 하지만 선명하고, 흐트러짐을 통한 강조된 드러내기 같은 흐름이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보이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있다. 보고 있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때로는 무언가 보이기도 하지만 실재적이지 않을 수 있다 느낀다. 그래서 유독 이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눈에 보이는 형상을 따라가 보게 된다. 남겨 놓지 않았지만 무심히 흩뿌려 놓은 발자취를 따라 눈과 머리를, 그리고 마음을 움직여본다. 운동감이 전해진다. 가볍게 시작할 것 같은 움직임은 점차 무거워지기도 한다. 예상했던 것 보다 묵직한 움직임이다. 너무 가볍거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거움이 아닌, 적당한 무게감이라고 해야 할까? 일정한 패턴이 있지는 않다. 다만 종종 느껴지는 운동감은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스며들어있으며, 이 때 일정한 율동감이 살아난다. 자유로운 율동감은 나도 모르게 어느새 도치되어 무의식의 흐름처럼 유유히 리듬위에 놓여있다. 리듬은 다시 일정한 율동 속에서 빗나감을 드러내고 사라짐을 반복한다.



어긋난 풍경. 어쩌면 확장된 풍경이라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장된다’라는 범위에서의 풍경이 단순히 큰 범주의, 통상적으로 말하는 자연의 경관의 확장이 아닌 풍경의 영역 자체가 벗어남에서 오는 일종의 유쾌함이자 통쾌함이 동반됨을 말한다. 그림과 나의 사이에서, 작가와 나의 사이에서, 그림과 작가의 사이에서 끈임 없이 빗나가고 어긋난 ‘그 때’를 추적하고 따라간다면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 지점에 조금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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