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너)의 그림이다(아니다)

2021.4.13 - 5.1
Willing N Dealing


공동큐레이터: 김성우
이세준, 정현두



전시소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는 2022년 4월 13일부터 5월 1일까지 회화 작가인 이세준, 정현두 2인전 <이것은 나(너)의 그림이다(아니다)>를 개최한다. 두 작가는 하나의 작업실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작업을 진행하던 중 서로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발생한 몇 가지 질문을 상대에게, 혹은 자신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화에 있어서 독창적인 스타일의 존재 여부와 각자의 그리기 방식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한지, 그리고 서로의 작업 스타일을 모사 혹은 참조하여 이미지를 완성한 경우, 각자의 회화적 방법론과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등을 질문하였다. 어느 날 이 두 작가는 서로의 그림을 바꿔서 그려보기로 했다. 즉 이세준은 정현두의 그림을 참조하여 그리고, 정현두 역시 이세준의 그림을 참조하여 그리기로 한 것이다. 서로의 회화 스타일을 관찰하고 질문하면서 모사를 해보거나 상대의 작업 스타일을 모방, 변주하여 자신의 화면을 만들며 이세준은 정현두가 되고 정현두는 이세준이 되는 기간을 가진다. 이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 관계를 돈독히 하고,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방식인 펜팔과 같이 화가로서 붓질을 나누는 행위, 즉 ‘Brush-pal’이라는 형식을 만들어서 진행한 서로의 그림에 대한 피드백과 방법론의 상호교환으로 그들이 애초에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세준의 화면은 평면을 향한다. 즉 특정 붓 자국이나 형상이 그려지면 그 이미지의 주변에 만들어지는 여백을 채워나가듯 또 다른 이미지와 배경이 들어선다. 꼼꼼하게 여백을 채워나가는 동안 이세준은 붓의 방향, 움직임의 길이, 물감의 색 등이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논리적인 답을 생각한다. 반면 정현두 작가는 즉흥적 움직임과 캔버스 위 물감의 발림의 상태, 농도 등에 따라 만들어낸 색과 이미지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면서 이를 반복한다. 화면 위로 쌓아나간 레이어의 이미지는 다채로운 색감을 드러내며 작가의 감각적 판단으로 완성된다. 이세준은 형광색과 원색, 검은색 등 정통의 회화에서는 보기 힘든 색채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작가이다. 원색의 채도를 유지하면서 알 수 없는 공간을 부유하는 구체적 형상을 지닌 대상과 조우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정현두는 색감의 밀도감을 더하면서 채도를 점차 무겁게 만들기도 하며, 표면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공간을 향하듯 전체 화면을 온전한 추상과 감각의 결과물로서 다룬다.
이번 전시는 김성우 독립기획자와 함께 작업 과정과 결과물,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질문과 결과들을 토론하면서 전시의 형식으로서 소개하게 되었다. 각 작가별로 형성해온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상호 교환한 작업 방식의 결과물로부터 회화작가로서의 유의미한 개념을 획득하였는지, 서로의 차이와 동일성은 무엇인지 등 작업을 둘러싼 질문과 대답을 설펴보는 전시가 될 것이다.











관찰자 시점 – 이것은 내 회화의 거울 이미지이다_ 김성우 (독립큐레이터)  

# 관찰 1.

외형상 꽤 다른 두 작가가 있다. 공통점이라면 이들이 화가라는 것 정도뿐, 여러 측면에서 작업의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주제적 측면에서도, 회화적 언어로서도 서로 매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세준 작가의 경우 그가 그리는 화면은 프레임의 내부를 향한다. 다시 말하면 이세준 작가는 프레임 내부에 모종의 세계를 가설한다. 그가 긋는 붓 터치 하나하나는 각자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며, 개별의 개체로 캔버스 내부의 세계를 구성한다. 모든 스트로크, 더 나아가 이미지는 물감이라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서의 의미에서 시작하여, 각자의 분명한 자리를 차지한 채 병렬로 나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화면 위 새나 나무, 인형 등의 이미지는 물감이라는 물질이 취하는 형상의 변주인 동시에, 붓질의 발현이며, 종국엔 우리가 알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모종의 해석적 가능성으로 풍성한 이미지의 외피를 두른 무엇이다. 그렇게 물감에서 비롯된 하나의 몸짓 – 스트로크에서 이미지까지 – 은 주변의 또 다른 몸짓을 파생한다. 심지어 한 화면에 존재하는 매우 넓은 색의 스펙트럼은 화면 위 대상들이 차지한 위치와 존재감을 더욱 두각 시킴으로 작가가 얘기하는 프레임 속 세계에 깊이와 차원을 배가하고, 분열증적으로 확산된 시각성 속에서 모종의 서사가 충동하기 시작한다.


반면, 정현두 작가의 작업은 프레임의 바깥을 향한다. 우선은 개별 화면에서 구체적 이미지나 명료한 서사를 전달하지 않는 그의 회화는 이세준과는 다르게 물감을 바르고, 다시 덮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순간의 포착이다. 이러한 감각은 곧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하곤 하는데, 즉 개별 프레임 너머 바깥에 존재하는 또 다른 프레임 속 이미지와 연동하며 서사는 확장하고, 그렇게 공간적 차원에서 연쇄하는 감각은 마주하는 관객의 감각으로 확장, 전이되는 식이다. 마치 물감이라는 물질을 뒤섞고, 지우고,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세준과는 다르게) 행위의 개별적 의미를 감추고 스스로 명료하게 말하기를 꺼리는 그의 화법은 마치 언어로 정의할 수 없기에 열린 구조 속에서 보기가 이끄는 감각의 진실로 향하게 된다.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상상했던 순간은 명징한 언어의 체계 반대편에 선 감각과 정서의 체계로 번역되고,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의 레이어가 선사하는 밀도와 채도, 그리고 붓질이 지닌 운동성은 사각의 프레임 바깥 더 멀리 모종의 시공을 열어젖힌다.


이렇듯 외형상 다른 작업에 더해 각 작가의 회화적 태도까지 언급해 보자면, 한 명은 다분히도 논리적(이세준)이며, 반대로 또 다른 한 명은 매우 감각적(정현두)이다. 붓의 방향이나 스트로크의 길이, 물감의 색과 농도 등에 대해 ‘왜’와 ‘어떻게’를 앞세우는 이세준에 비해, 정현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작가 고유의 감각과 즉흥적 움직임을 동원해 물감의 색과 발림이 만들어낸 충돌과 조화의 상황, 혹은 상태로 펼쳐내 보인다. 개별적인 붓질과 이미지의 자리를 온전히 지키며 화면을 구성하는 이세준의 회화는 고유의 논리 안에서 구상과 추상을 가로지르는 모종의 세계-프레임 내부를 두드리지만, 물감이 겹치고 더해지며 일어나는 중첩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정현두의 회화는 온전한 감각에 기대어 추상적 심상을 환기하며 프레임 바깥의 공간과 연쇄한다.


# 관찰 2.

<이것은 나(너)의 그림이다(아니다)>는 변증법적 회화, 즉 정반합의 법칙 아래 서로의 작업에 질문하고, 그로부터 어떤 배움을 얻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세준 작가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 본 전시는 펜팔과 같은 방식을 취한다. 즉, 편지를 주고받듯 화가로서 서로의 붓질을 나누는 행위, ‘Brush-pal’이라고 명명한 이들의 실험은 서로 다른 각자의 회화적 방법론을 보다 내밀한 차원, 즉 자신의 창작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피드백을 적극적 교환함으로 회화라는 드넓은 지평 위에서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서로의 특정 그림을 참조하여 ‘모사’라는 형식을 취하기에 이는 결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각자의 회화론, 그 창작의 과정에 주목하는 일과 같다. 기존의 협업 체제와 같이 과정 중심적 공동 창작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의 결과에 선행하는 태도와 실천의 양상들, 이를테면 사용하는 물감 컬러 차트나 붓질의 차이 등 개인만의 회화적 양식이라 할법한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자신이 만들어내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둔 채 오히려 그 내재적 ‘과정’을 곧 창작의 오브제로 치환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둘인 만큼 이러한 시도는 ‘전환’의 순간을 확보하게 한다. 여기서 ‘전환’이란 자율적이면서도 동시에 타율적인 발전의 논리를 제안하는데 유용한 개념이다. 다르게는 변화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환은, 내재적이거나 외재적이며, 또는 종종 두 개의 양상을 모두 포함하곤 한다. 즉 고정된 조건이나 정체된 상태를 내파하기 위한 차원에서 전환은 유효하다. 결국, 이러한 교환의 방법론은 내재적이면서도 외재적인 요인 사이에서 순응과 불응, 타협과 부정이라는 필연적인 요인들을 마주하고 수용하는 역동적인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작업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형식적/ 독자적 언어는 일종의 한계로 작용한다. 유연한 태도는 당연하거니와 기존에 달성한 회화적 성취는 자신에게 당면한 현재의 과제가 되며, 타인의 작업을 모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업을 진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렇게 점진적 발전의 과정을 위해 타인의 방법론을 기꺼이 수용하고,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자신의 회화적 방법론과 충돌하는 타인의 양식을 기꺼이 인정해야만 한다. 서로의 작업을 참조하며 상대의 회화적 언어를 세심하게 뜯어보고 심문하는 이 실험은 오히려 자신의 작업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시선의 거리를 가능케 하며, 현재까지 세운 자신만의 회화적 조건과 규칙에 반문하게 한다. 실제로 정현두의 이세준에 대한 모사가 화면 안에서 존재하던 이미지와 물질들을 오히려 견고한 듯 보이던 프레임에 전에 없던 진동을 더하는 존재로 전환하듯, 혹은 이세준의 모사가 정현두의 프레임 밖 또 다른 프레임으로 연동되던 감각을 사각의 단일한 평면 내부로 질선 정연하게 자리 잡게 하듯, 이 모사의 과정은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자신이 세운 규칙에 반하는 질문들을 양산하게 된다.


# 관찰 3.


모든 작업이 그렇겠지만, 특히 회화라는 장르는 작가 개인의 시선에 한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그리고 그 재현 너머에 가닿기 위해 온전히 일인칭 시점에서 캔버스를 마주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시점에는 시선의 주체로서의 욕망이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이 구축한 관점 아래 어떤 지점을 향한다. 회화라는 같은 멍에를 짊어진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보편으로서의 소실점은 사라지고, 각자 개인이 상상하는 서로 다른 소실점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세준, 정현두는 각자의 것을 탐닉하는 과정을 선행함으로 기꺼이 기존의 시점에서 거리를 두길 자처한다. 그렇게 두 작가를 제외한 타인들이 이들이 모사한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식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은 서로가 따라 그린 모작이 원래 각자의 작업과는 너무도 다르다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부터 관찰자의 시점이 더 깊이 틈입할 여지는 사라진다. 생산된 이미지를 독해의 대상으로 여기는 큐레이터에게 결과 이전의 행위 자체는 어쩌면 신비스러운 비밀의 영역일 것이다. 회화와 관련된 여러 물질과 도구들을 구축된 이미지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있지만, 창작자로서 그것과 관계 맺는 방식에까지 진입하기에는 ‘그리기’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오래도록 아카데믹한 학습을 받고, 고독한 수련을 거듭한 창작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이라는 이름을 빌미로 또 다른 욕망의 시점을 취하려던 나의 시선은 어느 단계에서 불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실험이 꽤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회화의 화면을 피부라 일컫는다면, 그 피부 표면 위를 부유하는 모종의 존재들과 그들로 구축된 세계(이세준)와 피부의 표층 아래에서 언어로 잡히지 않는 시공간의 감각이 생동하는 화면(정현두)이 교차하는 이 모종의 영역, 즉 서로를 모사함으로 취득한 이 화면들은 그저 상대를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각자의 회화적 언어의 규칙과 조건에 저항하고 반문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고유의 회화적 태도와 언어를 더없이 맑게 비추어내고 있다.

/
/
/
1) 이세준은 여타의 회화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매우 밝은 형광색이나 원색, 검은색 등을 자신만의 논리 안에서 구성적으로 사용한다.
2) 펜팔이란 편지를 주고 받음으로 관계를 돈독히 하고,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방식이다. 
3) 이세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피부 표면, 정현두 작가의 작업을 피부 아래의 것을 그리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당신(나)과 나(당신)의 대화. 정현두

A: 내가 당신을 따라 그린 그림과 진짜 당신의 그림이 무슨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B: 솔직히 말하면 그 그림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물론 당신은 내가 자주 쓰는 색을 참고했어요. 여러 기법을 연습하고 활용했죠. 저런 요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마치 내가 그렸을 거라고 생각할 만한 요소이긴 해요. 사람들은 저런 요소들을 보고 ‘나’의 그림이라고 구별할 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내가 추구하는 만큼의 예민함과 혼란스러운 감각에 도달하진 못했어요. 당신이 그린 그림은 나의 진짜 그림보다 정적이고 정리되어 보여요.

A: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요. 아시겠지만, 나 역시도 당신이 따라 그린 나의 그림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물감의 농도나 붓질의 속도, 색깔 등 말로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딘가 달라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파장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B: 맞아요. 당신을 따라 하기 위해 물감을 칠하는 순간부터 뭔가 잘못됐다고 직감했어요. 붓이나 기름의 양을 조절 해봐도 여전히 미묘하게 달랐죠. 심지어 당신의 그림에서 보이는 색을 그대로 쓰더라도 전혀 다른 색처럼 보이는 거예요.

A: 나도 비슷한 점을 느꼈어요. 당신과 같은 색을 써도 당신과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더라고요. 색에 대해서는 나도 이번 스터디를 통해 새롭게 깨달았어요. 색이 같아도 붓질과 물감의 농도, 화면 내의 배치 등으로 이렇게나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요. 우리는 매번 다른 색을 쓰지만 그림의 느낌은 항상 비슷하잖아요.

B: 가장 닮기 어려운 점은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이죠. 당신이 그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왜 저기를 저렇게 칠할까’ 수없이 생각해봤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난 저 부분이 좋아 보이는데 왜 저렇게 하지 않는지, 저기에 왜 저 색을 사용할 생각을 하는지 고민할수록 점점 더 모르겠는 거죠. 우리가 완전히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작업을 만들어내는 내적인 판단은 절대로 같아질 수 없다고 느꼈어요.

A: 당신의 그림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 위해 몇몇 기법을 연습하고, 그림의 일부를 모사하거나 창작을 해왔죠. 재밌는 건 그릴 때마다 내가 잘 따라 했다고 착각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그림을 따라 하면서 실력이 더 늘고 나니 이전 그림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깨닫곤 했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역시 나름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연습하고 당신을 이해한다면 부족해 보일 수 있고, 아마 지금 당신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더 연습하고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추구하는 방향을 완전히 이해하고 흉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네요.

B: 말씀대로 이전보다 많이 비슷해졌어요. 하지만 내 눈엔 여전히 색이나 기법이 비슷할 뿐 저 그림이 추구하는 방향은 많이 다르다고 느껴요. 당신이 말했듯 그냥 뭔가 다른 거죠.

A: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작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미숙하게 따라 그린 그림들은 우리의 진짜 그림과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야 저 그림을 직접 그리는 사람으로서 더 민감할 수 있겠지만, 그 차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요. 만약 열심히 보더라도 다른 점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그래 다른 건 알겠어, 그래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잖아’ 라고 대답할 수 있겠죠. 물론 나는 회화에서의 의미는 그림의 표현 자체라고 말하고 싶어요. ‘무엇을 그렸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그렸는지’ 자체가 회화의 내용이라고요. 그러니까 원래 우리의 그림과 서로를 모사한 그림의 차이는 곧 회화적 의미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B: 그렇지만 만약 정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야기는 의미가 있을까요? 가령 당신은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감각을 이야기하곤 하잖아요. 그리고 그 감각은 지금 당신의 기억 속 에만 존재하고 그림에선 느낄 수 없죠.

A: 예전에는 그리면서 생각했던 걸 이해받길 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많이 봤고, 이제 내가 생각했던 것이 전달될 수 없는 종류의 언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회화에 대해 이미 정의된 이론이 있고, 나의 그림을 그 이론에 빗대어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내가 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종류의 사고방식도 아니에요. 내 기준에서 회화는 1인칭 매체로서, 주관적인 판단이 없다면 존재할 수조차 없어요. 그 생각들로 인해 작업을 지속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말은 작업 태도 자체인 셈이죠.

B: 그렇네요. 당신은 작업을 하며 내적으로 일어났던 생각-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지요. 내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무척 중요하겠지만 나에겐 표면에서 드러나는 이미지가 더 중요합니다. 난 과정이 아닌 표면을 보여주고 싶어 해요. 나의 그림은 멀리서 봤을 때는 터치가 중첩되어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실제로 중첩된 부분은 많지 않아요. 그 모든 것이 한 겹으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고 그 점을 오히려 드러내려 하고 있죠. 이로서 그려낸 순서를 추측하기 어려워요. 붓질을 중첩하며 순서를 드러내는 당신과 차이가 있죠. 작업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려는 편이에요. 당신처럼 그림을 그릴 때 떠올렸다가 사라져버린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A: 맞아요. 나는 나의 작업의 과정을 떠올리며 바라봅니다. 하나의 그림을 그릴 때도 그렇지만 지금의 작업을 과거에서 현재로 변해온 과정 안에서 바라봐요. 예를 들어, 내가 더 이상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붓질만 사용하게 된 이유는 지금도 작업 아래 있는 거지요. 나의 초기작은 상상의 풍경화였어요. 그러다가 점차 실제 눈에 보이는 형상을 재현하거나 이미 공식화된 기호를 표현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어요.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는, 나의 회화적 충동이 그저 풍경의 시각정보가 아니라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각이라 느꼈기 때문에요. 그렇게 점차 사실적 표현이 사라지고,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신체적인 붓질로 채워진 지금 더 이상 풍경화라고 할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저 그림을 상상의 풍경화처럼 그렸고 바라보는 측면이 있는 거예요.
붓질들은 저기에 뭐가 있는 것만 같다고 상상하며 칠한 흔적이자 생각의 증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화면은 마치 내 앞의 벽처럼 서있어요. 그 벽은 새로운 의미를 전하는 인물처럼 나와 마주보죠.

B: 그런 의미라면 당연히 나의 지난 작업 또한 현재의 작업과 연관이 있어요. 난 내가 바라본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한 화면에 모두 그린다면 그것이 조금은 표현되지 않을까 기대했었죠. 실제로 그 당시의 그림들은 내가 경험하거나 생각한 것들을 닮아있어요. 내가 본 세계는 기묘하고 모순적인 상황들이 충돌하고 있었죠. 지금도 여전히 내가 바라보는 기묘한 세계를 표현하려 하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서 최대한 시각적인 자극을 일으키고 싶어 해요. 그 자극은 언어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감각적인, 내가 느끼는 모든 종류의 인지를 포함하는 거죠.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고, 나의 작업도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세준

이번 전시 <이것은 나(너)의 그림이 (아니)다>에 출품한 작품 중 일부는 나와 정현두 작가가 서로의 작업 스타일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상대방의 스타일 대로 그리려는 시도를 통해 나온 것들이다. 작업의 스타일? 작가의 정체성? 작풍? 어떻게 말해야 정확한 단어일까. 사실 난 이제는 스스로가 다른 이들과 차별화된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작품 활동을 막 시작할 무렵 즈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10여년 전에는 나도 '이세준만의 그림 스타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작가와 차별점을 두고 나만의 독창적인 시각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개성 있으면서도 매력있는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싶다..' 따위의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보면 민망스럽지만 얼마 간은 작위적인 스타일링의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에 맞지 않는 것들은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그렇기에 현재의 나는 적어도 의식적으로 어떤 인위적인 스타일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린다. 그냥 지금 그리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의 그리기를 상상하는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그리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목표와 전략에 대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가끔 그것들이 쉽게 잘 파악되지 않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정현두의 작업도 그러한 것들 중 하나 였는데, 그가 그의 그림을 통해서 닿고자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언지가 아리송했다. 명쾌한 논리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회화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게 자신의 감각만을 쫒아서 완성되는 것도 또 아닌 듯 싶어 보였다. 작가에게 직접 그림에 대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기도 했지만 주관적인 내적 논리와 규칙을 통해서 어떤 이미지와 (태도적인)완성에 도달하려 하고 있음을 이해 했을 뿐, 그 궁극적인 이미지가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현두의 작업에서 늘 같은 정도로 유지되는 어떤 항상성을 보았고(내게 있어서 항상성은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 기준 중 하나이다) 작가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도 좋은 쪽으로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내게는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붓 자국과 색채에서 매력을 느꼈고, 작업적인 영감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정현두의 작업을 흉내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2020년 여름, 경기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던 정현두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윌링앤딜링에서의 전시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연작(2019) 이후 그려진 회화들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붓을 들고 캔버스와 마주해야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021년 봄에 어쩌다보니 함께 작업실을 구해 사용하게 되면서 상상만 하던 이 계획을 비로소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붓을 손에 들고 나서야 그림을 보는 것과 직접 그리는 것은 정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우리가 서로의 작업 스타일을 따라 그리는 시도를 하기로 하고 내가 기대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였다.
첫 번째는 상대방의 그림을 흉내내 그리면서 내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을 자극 받고, 기술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스터디 개념의 접근이었다. 내가 해본 적 없거나 선호하지 않았던 방식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내 작업의 깊이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 있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이 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내 작업을 더 많이 이해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연구한 여정을 따라서 함께 살펴준다면 관람자들 역시도 이세준과 정현두의 작업을 보다 깊게 이해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시도를 통해서 서로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표현이라던가 태도? 혹은 색채? 그런 어떤 것이 있을 지 궁금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또 우리의 결과물들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을 우리는 작가만의 특별한 정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런 여러 기대들을 품고 시작한 프로젝트는 내 생각만큼 원활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붓을 잡고 캔버스에 물감을 쓱 바르는 첫 터치때부터 뭔가 '아..어라..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두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뒤에서 그의 작업 과정을 수도 없이 관찰했고, 의문이 생길 때마다 그와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았지만 얼핏 그의 그림을 이해했다고 믿는 것과 그 작가가 되어 그 처럼 그림을 새롭게 그려내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니 형상이라도 좀 있다면 더 쉬울 거 같은데, 정현두의 작품은 오히려 형상이 부재한 자리에 붓질, 색, 질감 등이 더욱 섬세하고 도드라지게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내가 관찰한 그는 그림을 계속 덮어가며 그린다.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와 완성된 그림이 아예 다른 색, 다른 구도일 때도 흔했고, 처음 칠했던 자국들을 모두 덮어서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나의 그림그리는 과정과는 완전하게 반대되는 특징인데, 내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최대한 적게 덧칠하고, 처음 던져놓은 붓 자국이 그림 안에서 대부분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정현두 작가의 경우 첫 붓자국은 그림이 완성될 즈음이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이는 그림을 대하는 태도, 그림의 목표와도 연결될 수도 있는데, 나는 본질을 얇고 매끈한 피부로 드러내고 싶어하고 정현두는 살 속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정현두 화풍의 그림을 진행하기 위해 붓과 캔버스 천부터 새롭게 준비해야 했다. 처음의 시도에는 그냥 내가 자주 사용해서 익숙한 인조모 붓을 가지고 그렸는데, 질감을 맞추기 위해서 좀 더 탄력이 좋은 돈모 붓으로 바꾸었다. 건성유의 양을 조절해서 물감의 농도를 맞추고, 린넨천을 직접 구해 오는 등, 천의 질감까지 점검하고 나서야 약간씩 비슷한 부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막막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내 그림을 그릴 땐 해 나가야 할 방향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완성되어 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림이 진행된다. 그러나 정현두의 스타일을 따라서 그린 작업들은 완성의 방향성에서 나 스스로가 계속 의문이 생겨서 작업이 원활하게 잘 진행되지가 않았다. 마치 사막에서 어디론가 달리면서 거기가 맞는 방향이길 기도하는 마음이었달까.

아무튼 나는 이 전시에는 정현두 작가 스타일로 그린 그림 두 점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고민했던 것들이 원래의 내 작업들 속에도 깊게 스미어들었기를 소망한다. 이 전시를 보러와 주시는 많은 분들께서 나와 정현두의 여정을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설프게 서로의 것을 흉내낸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의 작업을 관통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약간의 힌트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