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Gradually, Shadow Legs Hidden>
2024.1.10-1.31
A-Lounge
전시서문: 안소연
전시리뷰: 김성우
2024.1.10-1.31
A-Lounge
전시서문: 안소연
전시리뷰: 김성우

<나의 밤>
안소연(미술비평가)
안소연(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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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은 밤에 쓴 일기 같다.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 혹은 이미 사라진 형상들에 대하여 어떻게 다시 떠올려야 할 것인지, 그런 바람이 독백으로 쏟아낸 비밀처럼 빼곡하다. 내가 그의 그림을 두고 (쓰여진) 글 같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은, 순전히 언어에 대한 나의 지독한 회의와 의심에서, 그리고 그것의 공명하는 힘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종이 위에 쌓아 올린 글자들로, (침묵처럼) 비어있는 행간들에 둘러싸인 글(자)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사적인 형상을 가진 그림과 같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소설 『여름비 La pluie d'été』에서 에르네스토와 그의 동생들이 발견한 “불탄 책”의 형상을 (글로)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현두의 회화는 사적인 형상들이, 어쩌면 서로 결합할 수 없는 단어들-기억들, 사건들, 형태들, 물질들-이 돌연한 결합을 꾀한 것처럼, 기이한 침묵, 아니 무모한 의미의 박탈을 동시에 보여준다. 본래의 기억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육체)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밤의 기록은 자신을 넘어선, 오직 “쓰기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형상을 (간신히) 현전하게 하는 내막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회화는 “어떤 단어”를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미 해석 불가능한 임의의/익명의 형상을 지닌 단어로서, 그것을 읽는다는 것/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잔혹하게 훼손된 “불탄 책”의 깊은 고립처럼.] <서서히>(2023)와 <구름이 되고>(2023), <우리의 몸과 신체>(2023), <그림자가 숨은>(2023) 같은 제목은, 그러한 (불완전한) 낱말 안에 공명하는 형상들과 대면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속으로 상황을 이끈다. 그의 신중한 붓질이 만들어 놓은 “평면”은 (읽기 힘든) 단어들로 얽혀 있는데, 말하자면 “그려진” 형상들은 어떤 단어를 모방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둘[형상과 단어] 간의 반영 혹은 침투, 분리 같은 것에 의해 (아무도 모를)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구축해 놓는다.
그는 세 번째 개인전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에 관한 글을 써서 그의 그림을 이루는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을 대비시켜 놓았다. 관념적 살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로서 붓질을 견인하며, 물질적 살은 “붓질로 채운 화면” 위에 옮겨 자리한다. 이때, 정현두는 첫 개인전 《무지개를 쓴 사나이》(2017)와 두 번째 개인전 《밤과 낮의 대화》(2018)를 함께 언급하면서,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의 경계를 유희”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붓질[살]로 채운 “화면”을 하나의 “인물[살의 덩어리]”로 상상하게 되었다는 화가로서의 속내를 밝혔다. 결국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서는, 그와 익명의 그림[인물] 사이를 관통하는 사적인 대화가 그림과 그림, 즉 익명의 얼굴과 얼굴 사이를 통과하는/침투하는/벌려놓는 개별적인 단어들로 공명하면서 어떤 형상들을 주고받는 암묵적 관계에 대하여 용인해준다. 그러한 이미지의 출현은 사적이며, 동시에 “봄”과 “보여짐”의 지속적인 관계(의 역량) 속에서 마주하게 될 테다.
게다가 뚝 끊어진 것 같은, 저 절단된 경계면(들)은 시간을 계수하는 각각의 프레임을 자처하지만, 나란히 연속하는 전체 안에서는 사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주름처럼, 말과 말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열어놓은 (무한한) 공간에 대하여 상상하게 한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저 네 개의 연속하는 그림을 비연속적으로 그렸을 테고, 개별적으로 주어진 모서리의 한계를 질서 짓기 보다는 각각 펼쳐진 평면의 폭과 길이에 몸의 움직임을 (자유로이) 맞췄을 테다. 저기, 질서와 무관해 보이는 붓질의 움직임과 색의 겹침과 선의 엉킴 혹은 단절을 보자. 더구나, 흥미로운 반전은, 높이 225cm에 정확하게 맞춰진 서로 다른 크기의 화면이 순조롭게 연속하는 파노라마처럼 보이지 않고, 그려진 것/표현된 것에 의해 또 다른 경계 혹은 또 다른 분절이 더욱 증폭되는 인상마저 준다는 것인데, 그림 간의 벌어진 시차가 개별적인 화면의 (닮은/다른) 요소들에 의해 “지연”과 “유예”를 되레 더욱 강요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한다.
정현두는 네 개의 그림처럼 “서서히-구름이 되고-우리의 몸과 신체-그림자가 숨은”이라는 불가능한 문장을 펼쳐 놓고, 이 불가능 앞에서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의 시간을 밤처럼 쭉 늘려 놓는다. 본다는 것이 한없이 망설여지지만, 동시에 그 불가능한 것이 임의로 보여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되는, 랑시에르가 “이미지는 보여야 보인다”고 했던 말을 빌려보면, 보는 능력 앞에서 밤의 동공이 해내는 일이 된다. 정현두의 그림은 그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지연됨”을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을 텐데, 이번 전시에서는 형상의 연속적인 배열이 감추고 있는 그러한 시간들에 더욱 주목한 셈이다.
그의 회화는 “어떤 단어”를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미 해석 불가능한 임의의/익명의 형상을 지닌 단어로서, 그것을 읽는다는 것/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잔혹하게 훼손된 “불탄 책”의 깊은 고립처럼.] <서서히>(2023)와 <구름이 되고>(2023), <우리의 몸과 신체>(2023), <그림자가 숨은>(2023) 같은 제목은, 그러한 (불완전한) 낱말 안에 공명하는 형상들과 대면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속으로 상황을 이끈다. 그의 신중한 붓질이 만들어 놓은 “평면”은 (읽기 힘든) 단어들로 얽혀 있는데, 말하자면 “그려진” 형상들은 어떤 단어를 모방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둘[형상과 단어] 간의 반영 혹은 침투, 분리 같은 것에 의해 (아무도 모를)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구축해 놓는다.
그는 세 번째 개인전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에 관한 글을 써서 그의 그림을 이루는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을 대비시켜 놓았다. 관념적 살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로서 붓질을 견인하며, 물질적 살은 “붓질로 채운 화면” 위에 옮겨 자리한다. 이때, 정현두는 첫 개인전 《무지개를 쓴 사나이》(2017)와 두 번째 개인전 《밤과 낮의 대화》(2018)를 함께 언급하면서,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의 경계를 유희”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붓질[살]로 채운 “화면”을 하나의 “인물[살의 덩어리]”로 상상하게 되었다는 화가로서의 속내를 밝혔다. 결국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서는, 그와 익명의 그림[인물] 사이를 관통하는 사적인 대화가 그림과 그림, 즉 익명의 얼굴과 얼굴 사이를 통과하는/침투하는/벌려놓는 개별적인 단어들로 공명하면서 어떤 형상들을 주고받는 암묵적 관계에 대하여 용인해준다. 그러한 이미지의 출현은 사적이며, 동시에 “봄”과 “보여짐”의 지속적인 관계(의 역량) 속에서 마주하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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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는 정현두의 네 번째 개인전으로, 그림과 그림, 화면과 화면 간의 거리/간극을 통해 어떤 이미지의 잠재적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듯한 그의 최근 상황을 반영한다. <서서히>, <구름이 되고>, <우리의 몸과 신체>, <그림자가 숨은>은, 네 개의 그림이 간격 없이 나란히 세워져 하나의 큰 화면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크기의 면적을 가진, 어떤 순간에 임의로 결합된 네 개의 그림이 마치 하나처럼 벽에 붙어 서 있다. 이 분절된 화면들의 한시적인 결합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이루어진 붓질을 연속해 놓음으로써 아무 상관없는 사건들을 하나의 “지연된 서사” 속에 연쇄시켜, 오히려 그들 간의 명료한 시차를 흐릿하게 하는, 형상에 대한 보기(봄/보여짐)를 제안한다.게다가 뚝 끊어진 것 같은, 저 절단된 경계면(들)은 시간을 계수하는 각각의 프레임을 자처하지만, 나란히 연속하는 전체 안에서는 사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주름처럼, 말과 말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열어놓은 (무한한) 공간에 대하여 상상하게 한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저 네 개의 연속하는 그림을 비연속적으로 그렸을 테고, 개별적으로 주어진 모서리의 한계를 질서 짓기 보다는 각각 펼쳐진 평면의 폭과 길이에 몸의 움직임을 (자유로이) 맞췄을 테다. 저기, 질서와 무관해 보이는 붓질의 움직임과 색의 겹침과 선의 엉킴 혹은 단절을 보자. 더구나, 흥미로운 반전은, 높이 225cm에 정확하게 맞춰진 서로 다른 크기의 화면이 순조롭게 연속하는 파노라마처럼 보이지 않고, 그려진 것/표현된 것에 의해 또 다른 경계 혹은 또 다른 분절이 더욱 증폭되는 인상마저 준다는 것인데, 그림 간의 벌어진 시차가 개별적인 화면의 (닮은/다른) 요소들에 의해 “지연”과 “유예”를 되레 더욱 강요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한다.
정현두는 네 개의 그림처럼 “서서히-구름이 되고-우리의 몸과 신체-그림자가 숨은”이라는 불가능한 문장을 펼쳐 놓고, 이 불가능 앞에서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의 시간을 밤처럼 쭉 늘려 놓는다. 본다는 것이 한없이 망설여지지만, 동시에 그 불가능한 것이 임의로 보여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되는, 랑시에르가 “이미지는 보여야 보인다”고 했던 말을 빌려보면, 보는 능력 앞에서 밤의 동공이 해내는 일이 된다. 정현두의 그림은 그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지연됨”을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을 텐데, 이번 전시에서는 형상의 연속적인 배열이 감추고 있는 그러한 시간들에 더욱 주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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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두의 회화는 즉흥적인 제스처를 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붓질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이미지와 관계 맺는다. 이 말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이 아니라, 살짝 시차를 둔다면, (이미) 남겨진 붓질 앞에서 또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로, 어떤 굴레처럼 반복되고 어떤 이미지들의 지루한 병렬처럼 지속적이다. 이때, 그는 속도와 정지, 선명한 윤곽과 흐릿한 면, 높은 채도의 물감과 뒤엉킨 물질 사이의 경계를 비약적으로 충돌시키면서 일련의 평평한 화면을 구축해 놓는다. 그런 까닭에, 이 압도적인 평면에는 어떤 미시적인 시점과 거시적인 시점이, 화면의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빠른 붓질과 한 점에 멈춰 서서 망설임의 두께를 짓누른 붓질의 흔적이, 모두 거리낌 없이 공존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2023)는 무언가를 보게 하려는 충동으로 가득 찬 그림 같다. 사람 같고, 하늘 같고, 바위 같고, 나무 같고, 팔 같은 어떤 형상들이 “보이기 위한” 태세를 취하고 있다. 정현두가 말하는, 화면 위에 물질[재료]로서 실현된 이 “살”은 덩어리를 이루어 내면서 (재현과는 먼) 감각할 수 있는 무엇으로 비로소 “표현”된 것이다. 마치 이 그림과 마주한 육체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이미지처럼, 이러한 “다가감”과 “드러남”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과 그림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감각을 문제 삼은 바 있다. 그것을 매개하는 붓질이 있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와 화면 위에 남겨진 흔적은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를 갖는다. 마치 한 철학자의 말대로 이미지가 어떤 원형으로부터 필연적인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정현두는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보유한) 자신의 신체와 (어떤 원형의 흔적을 쫓는) 회화 사이의 간극/공백을 의식한다.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낱말의 결합이 만들어낸 그의 그림의 내막은, 이 필연적인 거리/간극/공백에 기인한다. “얼굴을 던진다”는 말 또한, 그 문장 안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의 작업에서 화면과 화면 사이, 얼굴과 얼굴 사이, 그러한 감각 사이의 주름 같이 접혀 있는 간극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문장을 다시 해체하여 낱낱이 살필 때, 그의 그림 전체 안에서 수평적인 결합뿐만 아니라 평면 위에 쌓아올린 물질 및 형상 간의 시차와 간극과 중첩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와 그 옆에 수직으로 잇닿은 벽에 걸린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2023)는, 서로 어떤 정황 속에 마주한 것처럼 익명의 사건을 일으킬[미래] 태세다. 아니면, 그것의 실패[과거]일 수도 있고. 이 두 그림 사이에서 내가 겪게 된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나는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단일한 시선 속에 그림을 마주해 놓고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그는 대체로 작업을 빨리 끝내지 못하고, 어떤 시간의 유예 속에서 종종 시차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만 아는 시간, 그 익명의 시간이 그림의 제목이 되곤 한다. 이때 그가 저 평면의 캔버스에 남긴 시간의 흔적은 “물질”과 “제스처”로 추상화 된다. 크고 납작한 붓으로 화면을 비스듬하게 지나간 움직임, 어떤 형상의 윤곽을 닮거나 미완성의 이미지처럼 보이는 선의 이동, 정지와 선회를 반복하면서 발생한 이상한 겹침과 은폐, 물질과 힘의 작용이 만들어낸 미세한 요철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역동적인 명암까지,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마치 뼈대와 살이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화석처럼 수수께끼 같은 평면/표면을 환기시킨다.
한쪽 벽에 어떤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린 <나무 다리 몸과 마음>(2023)과 <희망을 찾는 척>(2023)도 마찬가지다. 정현두는 붓질을 매개한 신체의 행위가 (마치 그대로 사진처럼 전사되듯) 새로운 물질을 얻어 평면 위에 (그것과 동일한) 이미지를 출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련의 회화적 조건을 따지는 것 같다. 화가의 행위와 회화 위의 추상적 이미지가 어떤 공통의 형상을 공유/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적인 낱말들을 (이리저리) 배열하면서 말이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2023)는 무언가를 보게 하려는 충동으로 가득 찬 그림 같다. 사람 같고, 하늘 같고, 바위 같고, 나무 같고, 팔 같은 어떤 형상들이 “보이기 위한” 태세를 취하고 있다. 정현두가 말하는, 화면 위에 물질[재료]로서 실현된 이 “살”은 덩어리를 이루어 내면서 (재현과는 먼) 감각할 수 있는 무엇으로 비로소 “표현”된 것이다. 마치 이 그림과 마주한 육체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이미지처럼, 이러한 “다가감”과 “드러남”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과 그림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감각을 문제 삼은 바 있다. 그것을 매개하는 붓질이 있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와 화면 위에 남겨진 흔적은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를 갖는다. 마치 한 철학자의 말대로 이미지가 어떤 원형으로부터 필연적인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정현두는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보유한) 자신의 신체와 (어떤 원형의 흔적을 쫓는) 회화 사이의 간극/공백을 의식한다.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낱말의 결합이 만들어낸 그의 그림의 내막은, 이 필연적인 거리/간극/공백에 기인한다. “얼굴을 던진다”는 말 또한, 그 문장 안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의 작업에서 화면과 화면 사이, 얼굴과 얼굴 사이, 그러한 감각 사이의 주름 같이 접혀 있는 간극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문장을 다시 해체하여 낱낱이 살필 때, 그의 그림 전체 안에서 수평적인 결합뿐만 아니라 평면 위에 쌓아올린 물질 및 형상 간의 시차와 간극과 중첩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와 그 옆에 수직으로 잇닿은 벽에 걸린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2023)는, 서로 어떤 정황 속에 마주한 것처럼 익명의 사건을 일으킬[미래] 태세다. 아니면, 그것의 실패[과거]일 수도 있고. 이 두 그림 사이에서 내가 겪게 된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나는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단일한 시선 속에 그림을 마주해 놓고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그는 대체로 작업을 빨리 끝내지 못하고, 어떤 시간의 유예 속에서 종종 시차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만 아는 시간, 그 익명의 시간이 그림의 제목이 되곤 한다. 이때 그가 저 평면의 캔버스에 남긴 시간의 흔적은 “물질”과 “제스처”로 추상화 된다. 크고 납작한 붓으로 화면을 비스듬하게 지나간 움직임, 어떤 형상의 윤곽을 닮거나 미완성의 이미지처럼 보이는 선의 이동, 정지와 선회를 반복하면서 발생한 이상한 겹침과 은폐, 물질과 힘의 작용이 만들어낸 미세한 요철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역동적인 명암까지,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마치 뼈대와 살이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화석처럼 수수께끼 같은 평면/표면을 환기시킨다.
한쪽 벽에 어떤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린 <나무 다리 몸과 마음>(2023)과 <희망을 찾는 척>(2023)도 마찬가지다. 정현두는 붓질을 매개한 신체의 행위가 (마치 그대로 사진처럼 전사되듯) 새로운 물질을 얻어 평면 위에 (그것과 동일한) 이미지를 출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련의 회화적 조건을 따지는 것 같다. 화가의 행위와 회화 위의 추상적 이미지가 어떤 공통의 형상을 공유/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적인 낱말들을 (이리저리) 배열하면서 말이다.

서서히/ 구름이 되고/ 우리의 몸과 신체/ 그림자가 숨은




그럼으로써 선명해지는 여기의 감각들
전시 리뷰, 김성우
전시 리뷰, 김성우
해석의 여지가 없는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는 쉬이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것은 독해를 기다리는
상징이나 도상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물질이 뒤엉켜 만들어낸 충만한 감각의 세계와도 같아 보인다. 때로
우리는 그 영역에 접속함으로 미지의 사유로 충만한, 어쩌면 실재보다 더 실재에 달라붙은 현실의 감각을
획득하게 된다. 정현두의 회화를 마주한 인상이 그렇다. 쉽게
잡히지 않는 대상, 오히려 도드라지는 붓질과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몸짓, 중첩되어 섞이고, 또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이탈하는 스트로크와 중첩된
색 면들, 더 나아가 그러한 겹침의 공간 속에서 때때로 드러나는 어렴풋한 감각적 잔상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회화는 회화적 물질의 질서로 구성된 현상인 동시에, 이러한
구성안에서 충실한 재현 이상으로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는 여러 감각적 경로를 제시한다. 그가 구성한 화면에는
그림과 이미지, 묘사와 소거, 서술과 생략의 구분이 사라진
채 작가와 대상이 함께하고, 시선의 주체와 객체가 허물어진 공존의 양상이 포착된다.
정현두는 근작에서 일견 대상을 지우거나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입히듯 제스처에 가까운 붓질을 앞세우며 재현이 아닌 감각적 화면을 구성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완전한 추상의 영역에서 그 어떤 외부의 레퍼런스 없이 홀로 서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초기 작업에 대한 언급[1]에서 현실의 숲을 동력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에겐 숲을 떠올리며 그려낼 수 있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면, 초록빛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들어선 어떤 풍경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작가는 숲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숲이라는 환경을 경험하는 감각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숲은 여러 주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끝없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것을 미술의 재현, 그러니까 선명하게 서술된 이미지-언어의 세계에 고착시키려 할 뿐이다. 사실 정현두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신체에 와닿는 촉각에 집중”[2]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상과 작가 자신의 거리는 급격하게 축소된다. 이는 시선의 주체로서 대상을 재현의 위치에 선 객체로 두기보다는 신체 감각을 관통하는 부분들로 수용하는 것, 더 정확히는 시각적 사실에 해당하는 대상의 표피와 그 대상을 포함하는 환경과 상황을 인지하는 감각적 조건 사이에서 촉발된 관념이나 상상을 붓질과 물감을 동원해 이어냄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그에게 바라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시각을 필두로 구축된 그간의 시감각적 위계를 넘어서는 일이며, 여타의 감각을 동원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동일 선상 위에서 재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이고, 자신을 둘러싼 대상과 긴밀히 연결된 차원에서 존재의 양상을 살피는 일과도 같다.
정현두의 작업이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을 참조한다고 할지라도, 작가는 명시적인 재현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대상과 작가 사이의 관계를 보다 극적으로 시각화한다. 그는 종종 회화의 안팎을 둘러싼 조건 위에 그만의 언술을 덧대어 재현을 우회하고 그 너머에 도달하려 한다. 이를테면 그는 과거의 전시 <<밤과 낮의 대화>> (위켄드, 서울, 2018)에서 “주어를 감춘 단순한 붓질”을 통해 획득한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정하려 했다고 말한다. 즉, 회화적 물질 – 물감 - 을 살[3]에 견주어 그것으로 구축한 독자적 화면을 일종의 인물이나 풍경에 빗대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어’란 대상을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형상에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바, 주어가 제거된 이미지는 추상의 영역으로 환원된 대상일 터이다. 결국 작가는 형상을 허물어트리는 추상화의 과정에서 자각하게 되는 자신과 대상 사이, 혹은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조건을 더욱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물질로 구현한 추상적 이미지와 그 너머의 선명한 감각 사이를 연결 짓는 독창적 시공으로서의 화면을 제시한다.
한편, 이러한 추상화의 과정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화면에서 나아가 서로 연동하는 관계망 안에서 확장된 시공을 창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작가는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19)에서 완결체로서 독립된 프레임이 아닌, 여러 그림이 화폭 너머로 관계를 맺는 양상을 실험한다. 마치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스트로크와 거칠게 올려지고 덧입혀진 색 면들로 그득한 본전시의 출품작들에서 이미지의 기원은 애초에 살피기 어렵다. 작가는 초기 드로잉 연작의 방법론으로서 여러 장의 종이 위에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 후 그것의 (재)배열을 통해 모종의 공간적 규칙을 가설한다. 그렇게 서로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동시에 연동하는 규율 속에서 이미지는 특정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오히려 물질의 다이나믹한 흔적으로 선명해진 작가의 몸짓,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캔버스의 화면 위로 전이된 작가의 현존만이 충동한다. 회화적 물질의 엮임 속에서 이미지의 생성과 사라짐은 반복하고, 이는 공간을 채운 또 다른 작업 위 짙게 남겨진 제스처와 연동하며, 작가의 기억과 경험, 상상과 현실이 혼재된, 재현 너머로 생동하는 시공으로 거듭난다.
정현두는 근작에서 일견 대상을 지우거나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입히듯 제스처에 가까운 붓질을 앞세우며 재현이 아닌 감각적 화면을 구성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완전한 추상의 영역에서 그 어떤 외부의 레퍼런스 없이 홀로 서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초기 작업에 대한 언급[1]에서 현실의 숲을 동력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에겐 숲을 떠올리며 그려낼 수 있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면, 초록빛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들어선 어떤 풍경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작가는 숲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숲이라는 환경을 경험하는 감각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숲은 여러 주변 환경의 영향에 의해 끝없이 흔들리고 진동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관습적으로 그것을 미술의 재현, 그러니까 선명하게 서술된 이미지-언어의 세계에 고착시키려 할 뿐이다. 사실 정현두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신체에 와닿는 촉각에 집중”[2]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상과 작가 자신의 거리는 급격하게 축소된다. 이는 시선의 주체로서 대상을 재현의 위치에 선 객체로 두기보다는 신체 감각을 관통하는 부분들로 수용하는 것, 더 정확히는 시각적 사실에 해당하는 대상의 표피와 그 대상을 포함하는 환경과 상황을 인지하는 감각적 조건 사이에서 촉발된 관념이나 상상을 붓질과 물감을 동원해 이어냄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그에게 바라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시각을 필두로 구축된 그간의 시감각적 위계를 넘어서는 일이며, 여타의 감각을 동원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동일 선상 위에서 재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이고, 자신을 둘러싼 대상과 긴밀히 연결된 차원에서 존재의 양상을 살피는 일과도 같다.
정현두의 작업이 어떤 대상에 대한 인상을 참조한다고 할지라도, 작가는 명시적인 재현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대상과 작가 사이의 관계를 보다 극적으로 시각화한다. 그는 종종 회화의 안팎을 둘러싼 조건 위에 그만의 언술을 덧대어 재현을 우회하고 그 너머에 도달하려 한다. 이를테면 그는 과거의 전시 <<밤과 낮의 대화>> (위켄드, 서울, 2018)에서 “주어를 감춘 단순한 붓질”을 통해 획득한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정하려 했다고 말한다. 즉, 회화적 물질 – 물감 - 을 살[3]에 견주어 그것으로 구축한 독자적 화면을 일종의 인물이나 풍경에 빗대는 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어’란 대상을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형상에 관련한 것으로 보이는바, 주어가 제거된 이미지는 추상의 영역으로 환원된 대상일 터이다. 결국 작가는 형상을 허물어트리는 추상화의 과정에서 자각하게 되는 자신과 대상 사이, 혹은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조건을 더욱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물질로 구현한 추상적 이미지와 그 너머의 선명한 감각 사이를 연결 짓는 독창적 시공으로서의 화면을 제시한다.
한편, 이러한 추상화의 과정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화면에서 나아가 서로 연동하는 관계망 안에서 확장된 시공을 창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작가는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19)에서 완결체로서 독립된 프레임이 아닌, 여러 그림이 화폭 너머로 관계를 맺는 양상을 실험한다. 마치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스트로크와 거칠게 올려지고 덧입혀진 색 면들로 그득한 본전시의 출품작들에서 이미지의 기원은 애초에 살피기 어렵다. 작가는 초기 드로잉 연작의 방법론으로서 여러 장의 종이 위에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 후 그것의 (재)배열을 통해 모종의 공간적 규칙을 가설한다. 그렇게 서로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동시에 연동하는 규율 속에서 이미지는 특정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오히려 물질의 다이나믹한 흔적으로 선명해진 작가의 몸짓,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캔버스의 화면 위로 전이된 작가의 현존만이 충동한다. 회화적 물질의 엮임 속에서 이미지의 생성과 사라짐은 반복하고, 이는 공간을 채운 또 다른 작업 위 짙게 남겨진 제스처와 연동하며, 작가의 기억과 경험, 상상과 현실이 혼재된, 재현 너머로 생동하는 시공으로 거듭난다.
연쇄,
그 행간을 넘나드는 공간적 문법은 최근의 전시<<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에이라운지, 서울, 2024)에서 더욱 확장한다. 작가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 - 각각의 이름을 지녔지만, 그조차도 분절되어 의미가 불분명한 제목과 함께 높이를 달리하며 리드미컬하게 위치한 서로 다른 면적의 화면들
-으로 화폭을 임의로 결합하고, 또 흩트려놓으며 서사의 완성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하나의 사건적 장면을 구축한다. “독백으로 쏟아낸 비밀”[4]과
같다고도 언급된 그의 작업들은 절단과 인접의 서사적 시퀀스 속에서 프레임의 외부와 프레임들 사이의 여백까지 장면의 일부로 포섭한다. 이미지의 연쇄와 연장은 각 화폭의 물리적 단절과 유격에 따라 명료한 서사적 운용을 미련 없이 철회하고, 그 잠재적 서사의 작동 가능성만을 내비친다. 이를 마주하는 관객은
이로써 각자의 서사로 눈앞의 사건을 추동하기 위한 골격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익명의 조각난 형상들과
불가해한 제목들, 그 해석의 불가능성으로 점철된 이곳은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기다리는 무한한 공간으로
새롭게 갱신, 출몰한다.
정현두가 펼쳐놓은 연쇄하는 이미지 사이에서 약동하는 감각은 그 어떤 서사적 해설보다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명료한 언어적 서술에서는 볼 수 없던 풍성한 감각으로 생동하는 서사의 다성적 층위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환유(metonymy)의 법칙과 닮아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화폭 속에 고유의 감각적 이해로 구축된 이미지는 화면 밖 다른 프레임의 이미지와 연동하고, 그렇게 이미지는 공간의 형식으로, 더 나아가 거기에 속해있는 관객의 감각으로 전이, 확장되어 새로운 사건적 서사로 요동한다. 명료한 언어와 하나의 의미에 정박하기를 꺼리는 그의 화법은 정의할 수 없기에 열린 구조 속으로 관객을 이끌며, 표피적 시각성에 충실한 재현을 초월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즉, 명징한 언어적 서술의 체계 반대편에서 감각과 정서에 기반한 질서로 축조된 정현두의 작업은 그 물질적 살, 물감의 두께와 레이어, 색감의 변용, 붓질에 투영된 운동성을 통해 재현적 이미지로는 감히 가닿을 수 없던 더 멀고 아득한 모종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1] 2019년의 개인전<<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의 도록에 기고한 작가의 글 <물질적 살_관념적 살>에서 정현두는 대상을 묘사하는 과정이 작가와 그림, 그리고 행위의 거리를 멀게 한다고 느껴 그러한 과정을 삭제한 붓질을 동원하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2]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작가노트 중, 4p
[3] 작가는 그간 그의 작업 과정을 ‘관념적 살’이라 부르며 쫓아온 머릿속의 이미지와 붓질로 신체를 얻은 화면, 즉 ‘물질적 살’ 사이의 경계를 유희하는 것이라 언급해 왔다.
[4]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 전시의 서문 <나의 밤> (글. 안소연)에서 안소연 비평가는 정현두의 작업을 보며 지난 기억과 사라진 형상을 떠올리기 위한 바람을 마치 비밀스런 독백으로 쏟아낸 것과 같다고 말한다.
정현두가 펼쳐놓은 연쇄하는 이미지 사이에서 약동하는 감각은 그 어떤 서사적 해설보다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명료한 언어적 서술에서는 볼 수 없던 풍성한 감각으로 생동하는 서사의 다성적 층위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환유(metonymy)의 법칙과 닮아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화폭 속에 고유의 감각적 이해로 구축된 이미지는 화면 밖 다른 프레임의 이미지와 연동하고, 그렇게 이미지는 공간의 형식으로, 더 나아가 거기에 속해있는 관객의 감각으로 전이, 확장되어 새로운 사건적 서사로 요동한다. 명료한 언어와 하나의 의미에 정박하기를 꺼리는 그의 화법은 정의할 수 없기에 열린 구조 속으로 관객을 이끌며, 표피적 시각성에 충실한 재현을 초월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즉, 명징한 언어적 서술의 체계 반대편에서 감각과 정서에 기반한 질서로 축조된 정현두의 작업은 그 물질적 살, 물감의 두께와 레이어, 색감의 변용, 붓질에 투영된 운동성을 통해 재현적 이미지로는 감히 가닿을 수 없던 더 멀고 아득한 모종의 시공간으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1] 2019년의 개인전<<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의 도록에 기고한 작가의 글 <물질적 살_관념적 살>에서 정현두는 대상을 묘사하는 과정이 작가와 그림, 그리고 행위의 거리를 멀게 한다고 느껴 그러한 과정을 삭제한 붓질을 동원하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2]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작가노트 중, 4p
[3] 작가는 그간 그의 작업 과정을 ‘관념적 살’이라 부르며 쫓아온 머릿속의 이미지와 붓질로 신체를 얻은 화면, 즉 ‘물질적 살’ 사이의 경계를 유희하는 것이라 언급해 왔다.
[4]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 전시의 서문 <나의 밤> (글. 안소연)에서 안소연 비평가는 정현두의 작업을 보며 지난 기억과 사라진 형상을 떠올리기 위한 바람을 마치 비밀스런 독백으로 쏟아낸 것과 같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