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Gradually, Shadow Legs Hidden>

2024.1.10-1.31
A-Lounge


<나의 밤>
안소연(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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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은 밤에 쓴 일기 같다.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 혹은 이미 사라진 형상들에 대하여 어떻게 다시 떠올려야 할 것인지, 그런 바람이 독백으로 쏟아낸 비밀처럼 빼곡하다. 내가 그의 그림을 두고 (쓰여진) 글 같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은, 순전히 언어에 대한 나의 지독한 회의와 의심에서, 그리고 그것의 공명하는 힘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종이 위에 쌓아 올린 글자들로, (침묵처럼) 비어있는 행간들에 둘러싸인 글(자)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사적인 형상을 가진 그림과 같다. [이 문장을 쓸 때, 나는 소설 『여름비 La pluie d'été』에서 에르네스토와 그의 동생들이 발견한 “불탄 책”의 형상을 (글로)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현두의 회화는 사적인 형상들이, 어쩌면 서로 결합할 수 없는 단어들-기억들, 사건들, 형태들, 물질들-이 돌연한 결합을 꾀한 것처럼, 기이한 침묵, 아니 무모한 의미의 박탈을 동시에 보여준다. 본래의 기억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육체)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밤의 기록은 자신을 넘어선, 오직 “쓰기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형상을 (간신히) 현전하게 하는 내막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회화는 “어떤 단어”를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이미 해석 불가능한 임의의/익명의 형상을 지닌 단어로서, 그것을 읽는다는 것/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테다. [잔혹하게 훼손된 “불탄 책”의 깊은 고립처럼.] <서서히>(2023)와 <구름이 되고>(2023), <우리의 몸과 신체>(2023), <그림자가 숨은>(2023) 같은 제목은, 그러한 (불완전한) 낱말 안에 공명하는 형상들과 대면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속으로 상황을 이끈다. 그의 신중한 붓질이 만들어 놓은 “평면”은 (읽기 힘든) 단어들로 얽혀 있는데, 말하자면 “그려진” 형상들은 어떤 단어를 모방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 둘[형상과 단어] 간의 반영 혹은 침투, 분리 같은 것에 의해 (아무도 모를)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구축해 놓는다.
그는 세 번째 개인전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2019)에 관한 글을 써서 그의 그림을 이루는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을 대비시켜 놓았다. 관념적 살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로서 붓질을 견인하며, 물질적 살은 “붓질로 채운 화면” 위에 옮겨 자리한다. 이때, 정현두는 첫 개인전 《무지개를 쓴 사나이》(2017)와 두 번째 개인전 《밤과 낮의 대화》(2018)를 함께 언급하면서,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의 경계를 유희”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붓질[살]로 채운 “화면”을 하나의 “인물[살의 덩어리]”로 상상하게 되었다는 화가로서의 속내를 밝혔다. 결국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서는, 그와 익명의 그림[인물] 사이를 관통하는 사적인 대화가 그림과 그림, 즉 익명의 얼굴과 얼굴 사이를 통과하는/침투하는/벌려놓는 개별적인 단어들로 공명하면서 어떤 형상들을 주고받는 암묵적 관계에 대하여 용인해준다. 그러한 이미지의 출현은 사적이며, 동시에 “봄”과 “보여짐”의 지속적인 관계(의 역량) 속에서 마주하게 될 테다.



서서히/ 구름이 되고/ 우리의 몸과 신체/ 그림자가 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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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는 정현두의 네 번째 개인전으로, 그림과 그림, 화면과 화면 간의 거리/간극을 통해 어떤 이미지의 잠재적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듯한 그의 최근 상황을 반영한다. <서서히>, <구름이 되고>, <우리의 몸과 신체>, <그림자가 숨은>은, 네 개의 그림이 간격 없이 나란히 세워져 하나의 큰 화면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크기의 면적을 가진, 어떤 순간에 임의로 결합된 네 개의 그림이 마치 하나처럼 벽에 붙어 서 있다. 이 분절된 화면들의 한시적인 결합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이루어진 붓질을 연속해 놓음으로써 아무 상관없는 사건들을 하나의 “지연된 서사” 속에 연쇄시켜, 오히려 그들 간의 명료한 시차를 흐릿하게 하는, 형상에 대한 보기(봄/보여짐)를 제안한다.
게다가 뚝 끊어진 것 같은, 저 절단된 경계면(들)은 시간을 계수하는 각각의 프레임을 자처하지만, 나란히 연속하는 전체 안에서는 사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주름처럼, 말과 말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열어놓은 (무한한) 공간에 대하여 상상하게 한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저 네 개의 연속하는 그림을 비연속적으로 그렸을 테고, 개별적으로 주어진 모서리의 한계를 질서 짓기 보다는 각각 펼쳐진 평면의 폭과 길이에 몸의 움직임을 (자유로이) 맞췄을 테다. 저기, 질서와 무관해 보이는 붓질의 움직임과 색의 겹침과 선의 엉킴 혹은 단절을 보자. 더구나, 흥미로운 반전은, 높이 225cm에 정확하게 맞춰진 서로 다른 크기의 화면이 순조롭게 연속하는 파노라마처럼 보이지 않고, 그려진 것/표현된 것에 의해 또 다른 경계 혹은 또 다른 분절이 더욱 증폭되는 인상마저 준다는 것인데, 그림 간의 벌어진 시차가 개별적인 화면의 (닮은/다른) 요소들에 의해 “지연”과 “유예”를 되레 더욱 강요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한다.
정현두는 네 개의 그림처럼 “서서히-구름이 되고-우리의 몸과 신체-그림자가 숨은”이라는 불가능한 문장을 펼쳐 놓고, 이 불가능 앞에서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의 시간을 밤처럼 쭉 늘려 놓는다. 본다는 것이 한없이 망설여지지만, 동시에 그 불가능한 것이 임의로 보여짐으로써 비로소 보게 되는, 랑시에르가 “이미지는 보여야 보인다”고 했던 말을 빌려보면, 보는 능력 앞에서 밤의 동공이 해내는 일이 된다. 정현두의 그림은 그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지연됨”을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납득하고 있었을 텐데, 이번 전시에서는 형상의 연속적인 배열이 감추고 있는 그러한 시간들에 더욱 주목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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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두의 회화는 즉흥적인 제스처를 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붓질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이미지와 관계 맺는다. 이 말은, 머릿속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다는 것이 아니라, 살짝 시차를 둔다면, (이미) 남겨진 붓질 앞에서 또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로, 어떤 굴레처럼 반복되고 어떤 이미지들의 지루한 병렬처럼 지속적이다. 이때, 그는 속도와 정지, 선명한 윤곽과 흐릿한 면, 높은 채도의 물감과 뒤엉킨 물질 사이의 경계를 비약적으로 충돌시키면서 일련의 평평한 화면을 구축해 놓는다. 그런 까닭에, 이 압도적인 평면에는 어떤 미시적인 시점과 거시적인 시점이, 화면의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빠른 붓질과 한 점에 멈춰 서서 망설임의 두께를 짓누른 붓질의 흔적이, 모두 거리낌 없이 공존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2023)는 무언가를 보게 하려는 충동으로 가득 찬 그림 같다. 사람 같고, 하늘 같고, 바위 같고, 나무 같고, 팔 같은 어떤 형상들이 “보이기 위한” 태세를 취하고 있다. 정현두가 말하는, 화면 위에 물질[재료]로서 실현된 이 “살”은 덩어리를 이루어 내면서 (재현과는 먼) 감각할 수 있는 무엇으로 비로소 “표현”된 것이다. 마치 이 그림과 마주한 육체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이미지처럼, 이러한 “다가감”과 “드러남”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과 그림 사이의 거리에 관한 감각을 문제 삼은 바 있다. 그것을 매개하는 붓질이 있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와 화면 위에 남겨진 흔적은 가늠하기 어려운 “거리”를 갖는다. 마치 한 철학자의 말대로 이미지가 어떤 원형으로부터 필연적인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정현두는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보유한) 자신의 신체와 (어떤 원형의 흔적을 쫓는) 회화 사이의 간극/공백을 의식한다.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낱말의 결합이 만들어낸 그의 그림의 내막은, 이 필연적인 거리/간극/공백에 기인한다. “얼굴을 던진다”는 말 또한, 그 문장 안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의 작업에서 화면과 화면 사이, 얼굴과 얼굴 사이, 그러한 감각 사이의 주름 같이 접혀 있는 간극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서서히, 그림자 다리 숨은”이라는 문장을 다시 해체하여 낱낱이 살필 때, 그의 그림 전체 안에서 수평적인 결합뿐만 아니라 평면 위에 쌓아올린 물질 및 형상 간의 시차와 간극과 중첩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닌 척 하다가 이렇게 되었네>와 그 옆에 수직으로 잇닿은 벽에 걸린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2023)는, 서로 어떤 정황 속에 마주한 것처럼 익명의 사건을 일으킬[미래] 태세다. 아니면, 그것의 실패[과거]일 수도 있고. 이 두 그림 사이에서 내가 겪게 된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나는 <폭풍우 구름 주먹 속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단일한 시선 속에 그림을 마주해 놓고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그는 대체로 작업을 빨리 끝내지 못하고, 어떤 시간의 유예 속에서 종종 시차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만 아는 시간, 그 익명의 시간이 그림의 제목이 되곤 한다. 이때 그가 저 평면의 캔버스에 남긴 시간의 흔적은 “물질”과 “제스처”로 추상화 된다. 크고 납작한 붓으로 화면을 비스듬하게 지나간 움직임, 어떤 형상의 윤곽을 닮거나 미완성의 이미지처럼 보이는 선의 이동, 정지와 선회를 반복하면서 발생한 이상한 겹침과 은폐, 물질과 힘의 작용이 만들어낸 미세한 요철 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역동적인 명암까지, 이 모든 것이 뒤엉켜 마치 뼈대와 살이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화석처럼 수수께끼 같은 평면/표면을 환기시킨다.
한쪽 벽에 어떤 거리를 두고 나란히 걸린 <나무 다리 몸과 마음>(2023)과 <희망을 찾는 척>(2023)도 마찬가지다. 정현두는 붓질을 매개한 신체의 행위가 (마치 그대로 사진처럼 전사되듯) 새로운 물질을 얻어 평면 위에 (그것과 동일한) 이미지를 출현시킬 수 있게 하는 일련의 회화적 조건을 따지는 것 같다. 화가의 행위와 회화 위의 추상적 이미지가 어떤 공통의 형상을 공유/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적인 낱말들을 (이리저리) 배열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