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체인지/ Dark Change>

2024.11.13-12.08
Willing N Dealing

기획 및 서문: 김진주

박노완, 정현두

다크 체인지》 전시 서문]


적막이 드리우고 어둠이 내리쬔 땅이다. 이곳의 두 사람이 선 곳은 그렇다. 고할 것이 없는 상태임을 알지도 못하는, 고할 것을 고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등살에 떠밀리기만 하는, 그렇다고 무고하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버렸다고 할까. 조만간 전기차가 이 세상의 수많은 도로를 소리 소문 없이 지배할 것만 같고, AI의 발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챗봇이 대필을 해 주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판국이다. 세상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는 염세적인 발상은 기대한 것이 그만큼 부족함과 답답함 없이 충족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하염없이 캔버스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붓을 그어대는 화가라는 이들이 있다. 화가라니. 빠르게 적합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이 시대에 불릴 만한 적절한 명칭이 맞는지 헷갈린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화가가 있다. 그것도 둘씩이나. 둘을 둘러싼 세상은, 세상의 속도와 방향성에 의지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버린 이들과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세상을 응원하거나 주도하거나 그것에 편승하기보다는 관망하거나 관조하거나 때로는 불평을 늘어댄다. 이들이 딛고 선 땅에 자신들의 그림자만큼이나 탁하게 늘어진 어둠이 두 사람을 적막 속으로 밀어 넣는다. 사라지라는 외침도 없지만 그렇다고 발버둥 치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아닌, 그래서 소거된 소리와 짓눌린 몸짓이 상충하며 만들어진 고요함이 이들의 주변을 이룬다. 그 안에서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묻는다면, 그리기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헛헛한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겠다.

《다크 체인지》는 지난겨울부터 박노완과 정현두가 대화와 글의 오감을 통해 암전과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누고 이를 각자의 작업에 반영한 이야기들을 비춘다. 박노완은 그간 수채 물감에 아라비아고무를 섞어 캔버스에 채색하는 방식을 유지하며 오늘날 가볍고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상적인 형상, 가상의 이미지를 엮어 스스로 미묘하게 체감하는 인지적 변화를 회화로 구현해 왔다. 정현두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동안 물감에 담기는 추상적 색채, 선을 화면 위에 표현하며 그리기의 시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일을 회화에 담아 내왔다. 지난여름, 두 작가는 기획자에게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라는 문구를 건네받고 그 이후에 벌어질 상상을 글로 쓴 뒤 교환했다. 그 과정에서 박노완은 음울한 미래를 제시하며 인간에게 일어날 피하지 못할 상황들을 암시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고, 정현두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인물을 제시하며 박노완과는 또 다른 초현실적 순간들을 펼쳤다. 이러한 상상은 의도했건 아니건 각자의 작업에 스며들었고, 이는 앞서 추구하던 작업 방식에 틈입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냈다. 눈에 띄게 흐릿해진 대상의 형상, 구체적인 묘사보다 기하도형으로 축소된 추상적인 외형이 박노완의 그림에 자리하게 되었고, 전에 없던 인물상이 등장해 뒤집히거나 잘리는 등 기묘한 행위를 반복하는 구성이 정현두의 그림에 나타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만든 그림에는 자신들이 갖추었던 기존의 질서와 동행하는 동시에 어긋나는 지점들이 솟아났다.

박노완은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라면, “나는 또다시 도망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서사 속에서 도망치는 인물은 “끝내 식별할 수 있는 형상을 남겨 그리는 일이 꽤 오래 유지되었던 나의 세계”였다고 회고하며 “기존 세계의 의미를 잠시 파기하고 내부적인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 보기로 한다. 즉 무너진 세계를 떠올리는 것은 박노완이 자신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글은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세계를 무너뜨린 것 또한 자신임을 자전적으로 깨달으며, 도망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전제를 내비추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멀어짐으로써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만큼의 “자율성과 만족감”을 얻었으며 그와 함께 “좌절을 겪었다.” 결국 그의 상상은 스스로 무너뜨린 세계가 도망을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려 준, 실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꾸준히 비관하게 되는 일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지속되는 탈출 욕구에서 오는 불쾌감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불평하면서, 그러므로 자신은 무고하다 외칠 수 없는 상태의 화가가 됨을 자꾸만 암시했다.[1]

                 정현두는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를 듣고, 세 가지 인물을 상상했다. 첫 번째로는 갑자기 비 같은 단단한 물질이 쏟아진 상황에 질릴 만큼 돈가스를 먹으며 세상을 관망하는 자신이었다. 이어서 그가 평소에 오락처럼 상상의 세계에 등장시켰던 단골손님인 과거 시절의 자신과 모든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이야기를 내밀었다. 첫 번째 상상 속 그는 그런 상황에 황당할 법도 하지만 “크리스털 세상 같다!”라고 외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위를 보세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있네요.”라고 말을 걸며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두 번째에는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하다가도 그저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호기심에 잠긴다. 세 번째에는 아무도 없는 세상에 “어차피 상상이니 유통기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편의점을 털”고 “직업도 친구도 없지만 누군가 남아 있으리라.”라는 희망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한편, 그런 상상들 끝에서 그는 “마치 아무도 보지 않을 그림을 홀로 그리거나 물감 덩어리를 보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대는 화가”를 떠올리며, 회화의 표면에 담길 창조된 인물들의 존재를 암시했다.[2]

                 연극에서는 무대 장치나 장면을 바꾸기 위해 조명을 끄고 무대를 잠시 어둡게 만드는 과정을 ‘다크 체인지(dark change)’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무너진 세계의 이후를 상상하는 일은, 동시대 화가가 그리기의 시간에서 늘상 마주하게 되는 적막과 어둠을 들여다보는 순간과도 유사한 것 같다. 이들이 지속하는 화가의 일과 회화의 표현은 이미 구축된 세계를 전복하고 뒤집다가도, 이어보고 붙여보는 과정의 연속이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회적, 문화적 확장을 지켜보며 그런 환경에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 이는 지금 이곳에서 화가라는 위치를 점한 이들에게 주어진, 매일 같이 해내도 계속해서 찾아올 끝없는 숙제일 테다. 고할 것이 없어도 늘 무언가 고할 것을 요청받는 화가들에게는 그저 무고하다는 말을 되뇌듯 지속과 암전, 전환과 또 다른 지속을 이어 나갈 자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박노완과 정현두가 오늘을 살아가는 화가의 자리에서 지켜 나가는 움직임으로써, 《다크 체인지》는 이들의 세계가 무너진 이후의 상상들을 펼쳐내 본다.



[1]이 문단에서 인용한 모든 글은 2024년 6월에 박노완이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라는 문장 다음을 이어서 쓴 A4 반 장 정도의 글에서 가져왔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며 현재와 미래마저 비관하고 좌절하는 그의 글은 어딘지 씁쓸하다.

[2]이 문단에서 인용한 모든 글은 2024년 6월, 7월에 정현두가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라는 문장 다음을 이어서 쓴 세 개의 짧은 글에서 가져왔다. 언제나 서사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스스로 ‘내적 세계’를 무너뜨리지만, 무너짐은 곧 나아가기 위한 확장이자 재건이라고 말하는 그의 글은 의외로 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