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던지는 사람들 /
The face throwers
2019.8.23 - 9.22
Willing N Dealing
2019.8.23 - 9.22
Willing N Dealing
정현두 개인전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 부쳐
글.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년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PT&Critic 프로그램에 선정된 정현두 작가는 100호 크기 화 면을 다채로운 색채와 붓의 흔적으로 가득 메운 추상회화 시리즈 9점을 선보였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PT&Critic은 그간 첫 개인전을 해야 하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 다. 굳이 첫 개인전으로서의 프로그램으로서 진행했던 것은 좋은 작가들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래서 선배 작가들의 현실적인 조언을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19년 부터는 PT&Critic 선정 대상은 더 이상 첫 개인전으로서가 아닌, 젊은 작가들 중 상호 의견 교환과 프리젠테이션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작가로 그 대상을 변경 하였다. 정현두 작가는 이미 2번의 개인전을 가졌었고, 작업에 대한 스테이트먼트를 몇 번 작성해 본 작가이다. 세대 간의 다른 방식의 방법론, 작업 서술에 대한 언어의 변화 등은 자 연스러운 현상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언어를 교정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 보다는 그 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고, 자신의 언어를 이야기 할 수 있고 이를 상호간에 최대한 이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 서 PT&Critic은 말하자면 ‘세대 간 상호 이해의 장’ 정도로 만들어질 것 같다.
정현두 작가는 얼굴을 그린 것일까, 지운 것일까. 작가는 ‘던지는’ 이라는 뉘앙스가 주는 속 시원함과 회화적 언어로서의 모호함 사이에 우리를 위치시킨 채 마치 수수께끼를 제시하듯 여러 가지 해석을 유도한다. 작가는 화면 위로 직관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드러 낸다. 관객의 눈은 이 두서없어 보이는, 자유분방하고 호기로운 움직임에 조응하며 작가의 언어를 탐색해 나간다.
이 작가의 캔버스에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 전시 제목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 평면성에 그치는 환영이 아닌, 물리적으 로 존재하는 신체를 관통하여 구현된 결과물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를 구 성하고 있는 각 아홉 점의 그림은 이번 전시 이전에 작가가 드로잉 연작 제작의 방법론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는 세 장의 종이를 두고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 후 이들의 배치를 바꿔가 면서 같은 과정의 그리기를 진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벽에 걸리는 세 장의 그림은 서로 이어 지는 부분과 분리되는 부분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이는 이번 전시의 캔버스들이 하나하 나의 개별 이미지로, 혹은 벽 전체에 걸린 모든 이미지의 연결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이유이 기도 하다.
작가는 초기 작업에서 숲의 풍경을 그리고, 숲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집중하여 재현하 였다. 재현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눈으로부터 받아들인 시각정보의 서술이었다. 보이는 특정 풍경 자체가 전달하는 묘한 감정을 옮기기 위하여 해당 장면을 담는 행위였지만, 작가는 이 내 이런 재현의 방법이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 다. 즉 시각정보로부터 추출된 주관적 감정은 그 객관적 형태의 묘사 과정에서 혹은 그 묘 사된 장면에서 다시 이끌어 내기에는 이미 일정 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정현두 작 가는 다시 이미지를 지워나갔다. 사라진 형태 끝에 남은 작가의 움직임의 흔적은 원래의 형 태를 가차 없이 지워나가는 몰아일체 된 역동적인 태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 지를 지운 캔버스 표면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 셈이다.
정현두 작가의 작업 표면에 그려진 혹은 발려진 물감의 흔적은 그 자체로 조형 언어가 될 수도, 그가 보고 있는 대상 자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가 머리 속에서 떠올리는 특정 단어가 시각 이미지로 현현되었을 때, 몸의 제스쳐가 더해진 손끝에서 발현된 특정 색과 형 태는 작가가 원하는 바로 그 대상을 선명하게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 작업에 서 환기하듯(*녹취록 참조) 눈앞의 화면을 묘사하기 보다는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실재 감각할 수 있는 촉각들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이 그의 회화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
정현두
물질적 살_관념적 살
초기작업의 동력은 현실의 숲이다.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얽히고 섞인 숲은 미세한 바람에도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진동하고 있다. 숲을 마주한 신체는 너무나 많은 시각정보로 인해 신체와 숲의 거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냄새, 습기, 공기의 흐름 등의 감각에 더 집중하게 된다. 숲의 모호한 형태를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상상이 떠올랐다. 상상-심상은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와 아주 가까운 덩어리-살’로 존재하는데, 마치 숲을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신체에 와 닿는 촉각에 집중하는 경험과 유사하다. 상상의 덩어리를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자세하게 묘사하는 과정이 오히려 나와 그림, 행위의 거리를 멀게 한다고 느껴서 묘사의 과정을 없앤 하나의 붓질로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다.
생각한 것을 붓으로 휙-긋는다. 캔버스에 발린 물감은 생각의 설명이기보다 생각한 순간의 기록에 가깝다. 나조차도 남겨진 붓질의 의미를 잊어버려서 마치 주어가 빠진 문장처럼 보인다. 우연히 형성된 붓질의 모양을 보고 상상한 이미지가 주어가 빠진 문장에 주어의 자리를 메운다.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관념적 살은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물감보다 나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서 실제의 살을 가리며 또 다른 생각-붓질로 이어진다.
붓질로 만드는 형태와 채색의 순서, 색을 통한 은유, 화면 전체의 짜임새 등, 작업의 과정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져버렸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상상을 상상으로 덮고, 자의적 기호를 자의적 기호로 덮으며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의 경계를 유희한다.
2017년 첫 개인전 ‘<무지개를 쓴 사나이>, 공간형’에서의 작업은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공간을 화면으로 옮기던 시기의 작업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삼차원적 공간을 그리던 방식이 점차 단순한 붓질로 변해가고, 단순한 붓질로 채운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상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개인전‘<밤과 낮의 대화>, 위켄드, 2018년’에서는 주어를 감춘 단순한 붓질로 얽은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정하는 연작을 전시했다. 인물이라 함은 인물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실제형체를 지닌 ’물감의 살’과 ‘관념적 살’을 오고가는 덩어리로서 재현적 공간으로 부터 독립적인 화면을 말한다. 주어가 빠진 물감의 살을 바라보며 인물과 풍경의 형상을 상상한다.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
작년(2018년) 초부터 스스로에게 건 제약, 즉 하나의 화면을 완결체로 생각는 그리기에 대한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의 화면으로 완결시킨 그림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관념적 살’은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물감보다 나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서 ‘실제의 물질-살’을 가리곤 한다. 여러 화면이 관념적 살을 섞으며 눈에 보이는 물리적 살을 뒤덮어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이러한 고민은 하나의 화면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그림을 통해 관계 맺는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연작으로 이어진다.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은 그림 하나의 제목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연작 총체를 지칭한다. 각각의 화면 속 인물이 자신, 혹은 상대방의 얼굴을 주고받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익명의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내가 화면위에 그어 둔 붓질 사이에 관념적 살을 찾고, 여러 화면을 바라보며 관념적 살을 지우고 입히는 과정과 중첩된다. 다시 말하면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서 ‘사람’은 그림이 지닌 이미지이자 그리고 있는 사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 등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행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 연작은 일종의 시간성을 지닌다. 하나의 작업으로 연작을 진행하면서도 한 그림을 끝내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갈 때마다 취향과 표현은 조금씩 변한다, 반복되는 제목은 여러 화면을 연관 짓고 이전 작업과 이후 작업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만든다.
글.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9년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PT&Critic 프로그램에 선정된 정현두 작가는 100호 크기 화 면을 다채로운 색채와 붓의 흔적으로 가득 메운 추상회화 시리즈 9점을 선보였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의 PT&Critic은 그간 첫 개인전을 해야 하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 다. 굳이 첫 개인전으로서의 프로그램으로서 진행했던 것은 좋은 작가들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래서 선배 작가들의 현실적인 조언을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19년 부터는 PT&Critic 선정 대상은 더 이상 첫 개인전으로서가 아닌, 젊은 작가들 중 상호 의견 교환과 프리젠테이션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작가로 그 대상을 변경 하였다. 정현두 작가는 이미 2번의 개인전을 가졌었고, 작업에 대한 스테이트먼트를 몇 번 작성해 본 작가이다. 세대 간의 다른 방식의 방법론, 작업 서술에 대한 언어의 변화 등은 자 연스러운 현상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언어를 교정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 보다는 그 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고, 자신의 언어를 이야기 할 수 있고 이를 상호간에 최대한 이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 서 PT&Critic은 말하자면 ‘세대 간 상호 이해의 장’ 정도로 만들어질 것 같다.
정현두 작가는 얼굴을 그린 것일까, 지운 것일까. 작가는 ‘던지는’ 이라는 뉘앙스가 주는 속 시원함과 회화적 언어로서의 모호함 사이에 우리를 위치시킨 채 마치 수수께끼를 제시하듯 여러 가지 해석을 유도한다. 작가는 화면 위로 직관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드러 낸다. 관객의 눈은 이 두서없어 보이는, 자유분방하고 호기로운 움직임에 조응하며 작가의 언어를 탐색해 나간다.
이 작가의 캔버스에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 전시 제목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 평면성에 그치는 환영이 아닌, 물리적으 로 존재하는 신체를 관통하여 구현된 결과물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를 구 성하고 있는 각 아홉 점의 그림은 이번 전시 이전에 작가가 드로잉 연작 제작의 방법론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는 세 장의 종이를 두고 하나의 이미지를 그린 후 이들의 배치를 바꿔가 면서 같은 과정의 그리기를 진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벽에 걸리는 세 장의 그림은 서로 이어 지는 부분과 분리되는 부분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이는 이번 전시의 캔버스들이 하나하 나의 개별 이미지로, 혹은 벽 전체에 걸린 모든 이미지의 연결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이유이 기도 하다.
작가는 초기 작업에서 숲의 풍경을 그리고, 숲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에 집중하여 재현하 였다. 재현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눈으로부터 받아들인 시각정보의 서술이었다. 보이는 특정 풍경 자체가 전달하는 묘한 감정을 옮기기 위하여 해당 장면을 담는 행위였지만, 작가는 이 내 이런 재현의 방법이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 다. 즉 시각정보로부터 추출된 주관적 감정은 그 객관적 형태의 묘사 과정에서 혹은 그 묘 사된 장면에서 다시 이끌어 내기에는 이미 일정 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정현두 작 가는 다시 이미지를 지워나갔다. 사라진 형태 끝에 남은 작가의 움직임의 흔적은 원래의 형 태를 가차 없이 지워나가는 몰아일체 된 역동적인 태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 지를 지운 캔버스 표면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 셈이다.
정현두 작가의 작업 표면에 그려진 혹은 발려진 물감의 흔적은 그 자체로 조형 언어가 될 수도, 그가 보고 있는 대상 자체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가 머리 속에서 떠올리는 특정 단어가 시각 이미지로 현현되었을 때, 몸의 제스쳐가 더해진 손끝에서 발현된 특정 색과 형 태는 작가가 원하는 바로 그 대상을 선명하게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 작업에 서 환기하듯(*녹취록 참조) 눈앞의 화면을 묘사하기 보다는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실재 감각할 수 있는 촉각들을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이 그의 회화이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
정현두
물질적 살_관념적 살
초기작업의 동력은 현실의 숲이다.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얽히고 섞인 숲은 미세한 바람에도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진동하고 있다. 숲을 마주한 신체는 너무나 많은 시각정보로 인해 신체와 숲의 거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냄새, 습기, 공기의 흐름 등의 감각에 더 집중하게 된다. 숲의 모호한 형태를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상상이 떠올랐다. 상상-심상은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와 아주 가까운 덩어리-살’로 존재하는데, 마치 숲을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신체에 와 닿는 촉각에 집중하는 경험과 유사하다. 상상의 덩어리를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자세하게 묘사하는 과정이 오히려 나와 그림, 행위의 거리를 멀게 한다고 느껴서 묘사의 과정을 없앤 하나의 붓질로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다.
생각한 것을 붓으로 휙-긋는다. 캔버스에 발린 물감은 생각의 설명이기보다 생각한 순간의 기록에 가깝다. 나조차도 남겨진 붓질의 의미를 잊어버려서 마치 주어가 빠진 문장처럼 보인다. 우연히 형성된 붓질의 모양을 보고 상상한 이미지가 주어가 빠진 문장에 주어의 자리를 메운다.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관념적 살은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물감보다 나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서 실제의 살을 가리며 또 다른 생각-붓질로 이어진다.
붓질로 만드는 형태와 채색의 순서, 색을 통한 은유, 화면 전체의 짜임새 등, 작업의 과정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져버렸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으로 이루어져있다. 상상을 상상으로 덮고, 자의적 기호를 자의적 기호로 덮으며 물질적 살과 관념적 살의 경계를 유희한다.
2017년 첫 개인전 ‘<무지개를 쓴 사나이>, 공간형’에서의 작업은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공간을 화면으로 옮기던 시기의 작업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삼차원적 공간을 그리던 방식이 점차 단순한 붓질로 변해가고, 단순한 붓질로 채운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상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개인전‘<밤과 낮의 대화>, 위켄드, 2018년’에서는 주어를 감춘 단순한 붓질로 얽은 화면을 하나의 인물로 상정하는 연작을 전시했다. 인물이라 함은 인물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실제형체를 지닌 ’물감의 살’과 ‘관념적 살’을 오고가는 덩어리로서 재현적 공간으로 부터 독립적인 화면을 말한다. 주어가 빠진 물감의 살을 바라보며 인물과 풍경의 형상을 상상한다.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
작년(2018년) 초부터 스스로에게 건 제약, 즉 하나의 화면을 완결체로 생각는 그리기에 대한 답답함을 느꼈다. 하나의 화면으로 완결시킨 그림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관념적 살’은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물감보다 나와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서 ‘실제의 물질-살’을 가리곤 한다. 여러 화면이 관념적 살을 섞으며 눈에 보이는 물리적 살을 뒤덮어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이러한 고민은 하나의 화면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그림을 통해 관계 맺는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연작으로 이어진다.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은 그림 하나의 제목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연작 총체를 지칭한다. 각각의 화면 속 인물이 자신, 혹은 상대방의 얼굴을 주고받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 익명의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내가 화면위에 그어 둔 붓질 사이에 관념적 살을 찾고, 여러 화면을 바라보며 관념적 살을 지우고 입히는 과정과 중첩된다. 다시 말하면 ‘얼굴을 던지는 사람들’에서 ‘사람’은 그림이 지닌 이미지이자 그리고 있는 사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 등 그림을 통해 무언가를 행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 연작은 일종의 시간성을 지닌다. 하나의 작업으로 연작을 진행하면서도 한 그림을 끝내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갈 때마다 취향과 표현은 조금씩 변한다, 반복되는 제목은 여러 화면을 연관 짓고 이전 작업과 이후 작업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