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uffle>
2025.12.16-2026.01.18
성곡미술관


서문: 김진주





정현두 개인전 《shuffle》 전시 글
시간을 뒤섞어 그림을, 김진주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대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141쪽.


      현실은 언제나 그럴싸한 순서로 찾아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실상 현실은, 동기를 상실한 모든 것이 무작위로 밀려 들어오는 총체의 솟아남이자 뒤섞임으로 운용된다. 정현두는 스스로 화가이기를 ‘자처’한다. 그는 무질서하게 입력되는 현실이 화가인 자신을 통과해 바깥으로 뻗어갈 때 형성되는 이미지를 회화의 표면 위에 던진다. 던지기. 말 그대로, 그가 체화하고 소화한, 혹은 감내한 온갖 종류의 상(像)들이 그의 머리, 어깨, 팔, 손목, 손, 손가락이라는 신체의 물리적 장치를 경유해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캔버스에 얹어진다.

       그는 이미지를 지연시키고, 시간을 유예시키며, 시차를 발생시킨다. 회화의 역사에서 새로울 것 없는 이 태제는, 현실이라는 배경에 입각해 보면 새로운 문제로 발굴된다. 현대(modern) 예술가란, 미술비평가 양효실이 어느 철학자의 책에 붙인 해설을 빌려보면 “예술을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하찮은 삶을 표현하고 재현하는 문제로 ‘강등시킨’ 이들”이다.[1] 그 이후의 현실을 살아가는 화가에게는 이제 교훈이나 이상을 선전하지 않아도 될 자유, 달리 말해 모두의 이상을 좇지 않음으로써 내밀해질 자유가 생긴 것이다. 정현두에게 그 자유는 자기만 아는 익명의 시간을 드러내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획, 마구 겹치는 색, 구체성이 없는 형태 등 그의 화면을 구성하는 것들은 그것의 기원인 자리에서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거나 서로 융합해 버리는 듯하다. 이는 질 들뢰즈가 “손적인 표시”라고 부른 것으로, 시각적인 것 전체를 방향짓고 구상적 가망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던 형상들을 끌어내는 방식이다.[2]그러한 과정은 그의 가장 내밀한 시간을 관통하며, 비로소 회화적인 것 그 자체로 표상된다.

       정현두의 개인전 《shuffle》은 그의 회화를 구성하는 뒤섞임의 양상에 주목해, 유동과 유예의 상태를 형식적으로 드러낸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회화를 선보여 온 그는 지금까지의 전시에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자기만의 방법론에 집중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그러한 방법론이 행해진 다음, 즉 그의 회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망한다. 여기서 그가 집중해 왔다는 방법론이란 회화의 물리적, 감각적 조건, 혹은 질료 차원의 이해와 같은 작업의 기반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하나의 완료된 어떤 현상이라고 본다면, 흩어진 여러 갈래의 현상이 하나의 장면(scene)으로 모이는 순간 완전히 뒤섞여 버린 시간이 솟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1층 전시실의 중앙 공간에는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설계된 대형 캔버스들이 배치되고, 그 주변을 둘러싼 벽에는 그가 2019년부터 최근까지 그려 온 10호 크기의 회화가 동일한 간격으로 설치된다. 2층에는 보다 자전적인 서사가 담긴 회화들이 놓인다. 이러한 구성의 핵심은 해석이나 결론, 정답을 보류하기 위한 시간의 혼합에 있다. 서로 다른 그림들이 옮겨붙고 맥락을 확장하는 상태, 달리 말해 표상들의 뒤섞임을 허용한 구성을, 그의 그림 이후에 벌어지는 일의 동력으로 상정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투입되는 모든 종류의 행위는 회화라는 것에서 무엇을 보고 이를 어떻게 다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지와 같은 질문을 남기며, 즉 ‘보기’의 틀이 교란된 상황 앞에 선 ‘나’를 마주하게 한다.

정현두가 그리려는 현실은 지극히 사적이다. 너무나 내밀하여 그 근원을 이해하기 힘든 정도로 파고드는 내면의 이야기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총체가 되고,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 된다. 1층의 공간을 점유한 대형 회화 작업들은 ‘뒤집힌 세계’라거나 ‘땅 위에…’, ‘빛과 그림자’, 언덕, 인물, 중력, 풍경, 몸, 신체 같은 키워드를 주제로 삼는다. ‘ㅇㅏㅇㅏㅇㅏ’, ‘ㅏㅒㅖㅓ’처럼 무의식적인 외침을 형상화한 활자의 나열이 제목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보인다. 이 회화들은 특별한 규칙이나 장르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단지 각각이 정현두가 경험한 일상의 장면 중 일부이거나 어떤 골몰에 빠진 채 그에게 이어진 시간을 압축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 간의 연관성이 흐리기 때문에, 하나 하나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할수록 그림은 끝없는 미궁만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그림에서 열 발짝 정도 떨어져 여럿을 함께 본다면, 모든 현실이 잠정적으로 유예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뒤섞이도록 내버려진 현실이라는 점에서만 유효해지는 장면들. 그러므로 이 공간은 고정된 움직임이 아닌 유동의 상태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구성을 표방한다.


대형 회화 작업에 붙은 제목의 뒷부분에는 언제나 그림을 그린 날짜가 따라온다. 그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작업 제목으로 자신이 해당 그림을 그린 기간을 써 왔다. 1층 전시장의 벽면에는 그 날짜들에 주목해 나열한 그림들이 배치되었다. 2019년부터 2025년까지, 매일같이, 어떻게 보면 기록된 회화들이다. 이는 얼핏 일기장 같은 사생활의 엿보기처럼 단조로운 서사로 읽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어떤 장면도 끝까지 정주하지 않는 유목적 놓임에 가깝다. 연작의 배열에서 가장 먼 과거의 작업은 전시장의 처음이 아닌 중간쯤에 걸려 있다. 그 왼쪽으로는 그보다 미래의 시간이 이어지며, 점점 최근을 향해 가고, 종국에는 가장 가까운 과거가 가장 먼 과거의 오른쪽에 놓인다. 다르게 말하면, 이곳에서만큼은 가장 가까운 과거의 과거는 그 직전의 과거가 아니라, 가장 먼 과거의 것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묘하지만 강하게 뒤섞이는 시간을 목격한다. 시간은 그것의 선형적 속성이 무시된 채, 그의 작업을 읽어내는 하나의“알레고리”로 작동한다.[3]다시 말해, “현실에 발을 디디고도 벌써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상태로 우리를 이끈다.[4]
       결과적으로, 1층의 두 가지의 구성은 정현두 회화의 핵심이 이제 이미지 생산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지들 사이의 시차를 조직하며 회화가 능동적으로 시점을 형성해 나가는 상태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그의 회화를 바깥에서 관람하는 관객, 그리고 회화를 만들어 낸 사람인 정현두는 정해진 의미를 완성하는 일종의 ‘플레이어(player)’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 가는 ‘독해자(interpreter)’가 되어간다. 마치 정현두가 신체를 휘둘러 이미지를 던지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의 회화에 잠재된 의미는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며, 지연되고 유예된 시간의 낙차 속에서 뒤늦게 도착한다.

       그렇다면 2층에 자리한다는 작가의 자전적인 그림들이란 무엇인가. 이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작업의 근원에 관한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그의 회화에서 ‘의심’은 떼어낼 수 없는 논점이다. 그러나 이는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심을 지속하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그리기 위해 다시 의심하는 일로서의 쟁점이다. 현실이, 시간이 뒤섞이는 삶을 살 때,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회화가 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공상이 맴돈다. 지속되는 물음, 질문, 의심, 회의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화가로서의 삶. 그의 자화상은 목적이 분명한 몽타주가 아니며, 그가 그린 풍경화는 실제 풍경이 아닌 과거에 그린 자기 그림의 모방이다. 그림을 계속 그린다는 조건 하나로 버티는 삶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격한 것일까. 그런 삶은 끝내 답에 도달하지 못한 손이, 다시 한번 붓을 드는 일로 유지된다.

       결국 ‘shuffle’은 단순한 그림 섞기를 넘어 이유와 관점의 섞기라고 할 수 있겠다. 1층에서 우리는 그림을 밀고 움직이며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어느 곳에서나 의미는 생성될 것이고, 어느 곳에서도 의미는 생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위는 허무나 소진으로 빠지려던 찰나에 해석의 실패라는 낯선 가능성에서 발생하는 뒤섞임으로 다가와, 그것이 그 자체로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알게 만들 것이다. 정현두는 의미 대신 시간을, 완성 대신 가능성을, 해석 대신 시점을, 연속 대신 변동을 스스로가 스스로를 납득하는 근거로 삼아 회화를 굴린다. 불확정적인 세계, 이 현실, 이 시간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굴러간다. “화가의 문제는, 그가 이미 화폭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나오는 것, 그럼으로써 판에 박힌 것과 가망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5]



[1] 양효실, 「작품해설 - 기스와 들라크루아: 현대적 삶의 화가와 위대한 화가」,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정혜용 옮김, 은행나무, 2014. 166쪽.

[2]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111-113쪽.

[3] ‘알레고리’라는 표현은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견해에서 빌려왔다. 황현산은 2019년에 발간한 평론집에서 알레고리란 초역사적이고 통합적인 상징과 달리, 시대적이고 파편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그는 알레고리가 “문화적이고 사적인 약점에 의지하여, 본질적이고 튼튼하다고 믿었던 삶의 토대가 허망”한 것임을 알게 하며, 이 파편성을 통해 “현실의 고리가 거의 끊어진 자리에서 미래의 한 점을 향해 정신을 투기하고, 논리적으로 현실의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리에서 그 현실의 질적 변화를 전망한다.”고 썼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황현산 평론집』, 난다, 2019. 81-82쪽.

[4] 황현산, 같은 책, 83쪽.

[5] 질 들뢰즈, 같은 책, 112쪽.


 

 



 

 





    12월 작업실, 사람                                                              
oil on canvas, 72.7x53cm, 2024                                                                                           

가족초상화
mixed media on pacper, 36.7x27.8cm, 2024

풍경의 그림
oil on canvas, 40.9x53cm, 2025